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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40호
발행연도
2006.1
수록면
1 - 26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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雍城에서 咸陽으로 -秦都의 變遷과 關中平原의 地域開發- 村松 弘一 기원전 8세기 西垂(지금의 감숙성 禮縣)를 거점으로 秦國은 성립하였다. 황토고원 서부에 위치한 서수는 군사적․문화적 교통로서의 중요성과 소금․철․목재 등의 자원 생산지라는 두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진은 그 후, 약 100년에 걸쳐 기원전 7세기 초에 雍城으로 진출한다. 황토고원 서부의 서수에서 관중평원 서부 옹성으로의 천도와 그 지역개발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서수에 그 중심을 두면서도 周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周人의 관중평원 서부에서 개발방법을 계승한 진의 신흥세력이 대두하여 서수의 구세력으로부터 실권을 빼앗고 옹성을 도읍으로 정한 과정이 고찰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 전반 진은 다시 동쪽으로의 천도를 시작한다. 이 과정도 서수에서 옹성으로의 천도와 마찬가지로 涇陽․櫟陽으로 도읍을 차례차례 옮기면서 기원전 350년이 되자 점차 咸陽으로 도읍을 정하게 되었다. 두 도시로의 천도는 穆公시대에는 영유하였지만 그 후 晋에게 빼앗긴 河西지역의 회복을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관중평원 동부 공략을 위해 秦公의 거주지가 최전선에 위치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또한 진공이 전선에 참여하지 않고 옹성에 머물러 지휘하의 가신을 파견하여 보다 안전하게 세력 확대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왜 관중 평원 동부에 도읍을 옮길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또한 함양에 이르기까지의 천도 과정에 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다. 본 보고에서는 진의 옹성에서 함양으로의 천도와 관중평원 동부의 개발과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제2절에서는 지금까지의 통설인 진 옹성에서 함양에 이르는 천도과정을 다시 고찰하여 옹성→경양→옹성→역양→함양 이라는 과정을 거쳤다고 결론지었다. 제3절에서는 천도의 배경이 되었을 관중평원 동부의 개발과정을 고찰하기 위해서 관중평원 동부의 도시건설과 진의 지배에 관해서 정리하였다. 함양 천도 이전에 설치된 현은 모두 秦과 晋․魏와의 항쟁지점으로 주로 河西라고 불리는 낙수와 하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어서 하서에서 秦과 晋․魏의 항쟁에 대해서 정리하였다. 진 목공 무렵(기원전 7세기)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진이 하서에서 안정된 지배를 달성한 것은 함양 천도 이후의 혜문왕 원년 무렵이었다. 결국 관중평원 서부에서 동부로는 옹성→경양→옹성→역양→함양⇒관중평원 동부의 개발(도시건설)이라는 천도 과정을 거친 것이다. 제4절은 개발이 진전되기 이전에 관중평원 동부로 도읍이 천도된 배경을 아래와 같이 고찰하였다. 우선 경양․역양․함양의 도시는 對晋․魏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塹落長城의 건설에 보이는 것처럼 관중평원 동부로는 장기간에 걸친 이동과 광대한 지역에 군사력이 집중되어 그 군사력을 배경으로 옹성의 세력으로부터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식량공급은 관중평원 서부에 의존하였다. 이 때문에 옹성과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관중평원 서부와 황하하류 유역의 두 곳에 이르는 교통로에 위치한 함양이 수도로서 선택된 것이다. 이와같이 西垂에서 옹성으로의 천도와 옹성에서 함양으로의 천도는 지역개발과의 관련에서 완전히 다른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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