突厥은 696년 거란을 진압하는 군사적 원조를 계기로 武周로부터 고비 남부의 降戶와 單于都護府 관할 지역 등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또한 거란 진압 이후 突厥은 武周를 제치고 거란을 비롯한 동부의 奚와 霫마저 차지해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698년에 돌궐은 이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河北 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약탈을 통해 고비 남북의 초원을 모두 차지한 유목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향후 이를 기반으로 서방으로의 진출하려고 했다. 이것은 모두 突厥이 전략적 중요했던 고비 남부 초원을 武周로부터 탈환해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突厥은 발전을 위해 武周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武周 역시 이런 위협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막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武則天 말기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705년 中宗의 복벽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특히, 706년 12월 鳴沙縣에서 唐軍이 대패한 이후 中宗은 突厥의 위협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北伐을 구상했다. 구체적인 북벌 내용은 유능한 主將을 뽑아 변방에 일단 근거지를 세우도록 하고, 이를 통해 공격에 필요한 역량을 강화함과 동시에 유목 세력들을 以夷制夷해 突厥의 내적인 역량을 약화시켜 무력 정벌을 하는 것이었다.
北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朔方道 行軍大總管으로 突厥과의 전투에서 많은 경험과 식견을 갖고 있던 張仁愿이 708년 5월 발탁되어 15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이 때 突厥은 西突厥 지역의 내분에 간섭하기 위해 고비 이남에 있는 병력까지 모두 출정을 했기 때문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黃河까지 쉽게 북상을 한 張仁愿은 강을 건너가 적지에 行軍을 주둔시킨 다음 세 곳의 受降城을 60여일 만에 건설했다. 이에 대해 조정 내부에서 적지에 성채를 세우는 것에 대해 반대도 있었지만 中宗의 강력한 북벌 의지로 인해 건설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中宗은 西受降城에 그동안 명목만 남아 있던 安北都護府를 이동시켜 突厥에 대한 대응과 함께 초원의 유목 부락들을 향후에 羈縻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北伐을 위한 1차 준비를 마친 中宗은 突厥을 포위하기 위해 초원 북방의 키르기즈와 西突厥 지역의 튀르기쉬마저 포섭했다. 동시에 계속 자신을 괴롭혔던 吐蕃마저도 金城公主를 보내 우호적 관계를 맺어 서부의 걱정거리를 없앴다. 이것을 통해 突厥에 대한 완벽한 포위망의 형성이 이루어져 北伐을 위한 2차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710년 5월 80만 대군을 동원해 北伐이 선언되나 실행 직전 中宗이 바로 독살되면서 모든 계획이 중단되었다. 반면 정변을 통해 즉위한 睿宗과 화해에 성공한 突厥은 바로 자신을 포위 공격하려고 했던 키르기즈와 튀르기쉬를 격파해 포위망을 와해시키고 나아가 과거 第一帝國時期의 영역을 다시 확보함으로써 ‘완전한 부흥’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와 달리 唐朝는 내부의 문제 등으로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체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中宗의 北伐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버렸지만 이후 玄宗이 中宗을 이어 집요하게 내적인 분열을 일으킨 다음 突厥을 포위하고 北伐을 추진함에 따라 716년 결국 카프간 카간 권력이 붕괴되었다. 그리고 과거 北伐을 위해 건설된 三受降城 역시 투항한 유목 부락들을 羈縻하는 기관인 都護府의 치소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北伐을 준비했던 中宗의 노력이 그 사후에 결국 突厥으로 무너뜨리는 성과의 기초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비록 표면적으로 재위기간이 짧고 결과도 없어 보이지만 中宗시기 대외 정책의 핵심인 突厥에 대한 北伐 구상과 추진이 8세기 唐朝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구축하게 하는 출발점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