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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69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239 - 272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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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 정부의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言官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科道官의 정보 수집과 공개, 여기 따른 여론 형성 과정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논의되는 안건들 속에 진위를 판별하기 힘든 다양한 정보와 소문들이 개입되면서 격렬한 논박이 오가는 일이 빈번하게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황제의 최종 결정은 많은 부분 조정 회의인 廷議의 결의 사항을 재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廷議 역시 공개와 공론에 근거한 합의라는 원칙하에 진행되었다. 이런 중층적인 의결 구조와 정책 결정은 전쟁 기간 중에는 국론 분열과 논의의 과열화라는 난맥상을 보였다.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에서는 기존 명조 정치 관행의 음영이 어떤 국면보다 극적으로 두드러지는 점을 控于錄을 통해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명조의 공개형 정책 결정은 분명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신속과 기밀, 정확성을 생명으로 하는 전쟁 전개 과정에서 명조의 이런 개방 구조가 반드시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다. 정보 수집과 공개, 여론 수렴 과정이 이어지면서 특히 전쟁 피해자인 조선의 입지는 대단히 좁아졌고 한정된 경로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점, 조선이 명조의 논의 과정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끊임없이 조선의 사정을 알리는 告急 사절들을 파견해야 했던 사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사실 명조의 여론은 언제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모르는 유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앞에서 石星과 李化龍 등 화의파가 주장했던 조선책임론은 당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 뒤에는 ‘여론화’하여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石星 등은 조선의 나약함으로 인해 결국 전쟁이 장기화되었다고 비판하며 군사 지원을 막고자 했다. 이런 시각은 사실 화의파들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와 유사한 ‘조선책임론’은 전쟁 직전부터 명대 사회 일각에서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었고 일부는 역사 기억으로 전승되기도 했다. 일례로 명말청초의 역사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明史紀事本末』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항목에는, “이 때 조선에는 평화가 길어져 겁이 많고 싸움에 익숙하지 못하며 소문만 듣고도 허둥대며 무너져 내렸다. 조선왕은 창졸간에 수도를 벗어나며 둘째 아들에게 국사를 지휘하라고 명령하고 평양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귀속되기를 원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저자인 谷應泰는 평에서 “關伯은 본래 薩摩州 사람으로 倭의 무리 중에서 좀 더 교활한 자일 뿐, 기이한 재주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며 무용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다만 (조선왕) 李昖이 술에 빠져 조선의 수비가 해이해지자 교활하게도 이를 틈타 병탄하고자 했다”라는 식의 평가를 내렸다. 조선에 대한 이런 비하와 비난여론이 제기되어 정유재란 과정에서 여러 차례 조선에게 불리한 국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소문과 정보가 뒤섞여 나타난 조선에 대한 공격적인 여론들 역시 科道官의 적극적 활동과 廷議를 통한 의사 수렴 과정에서 보다 강력하게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 긍정적으로 본다면 모든 정보와 논의를 체제내로 수렴시킨 명조의 의사 결정 과정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정책을 선택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재참전 논의 과정에서 조선 사절단이 여기 개입함으로써 석성 등 화의파의 정보 조작과 잘못된 상황인식, 자의적 정책의 오류를 증언하여 조선 원조를 주장하는 여론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사실 石星등 화의파들 역시 1593년 화의를 추진하면서 조선 조정을 위협하여 조선이 화의를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다는 그릇된 정보를 제시하고 이를 유력한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鄭期遠 사절단의 활동은 활동 범위와 영향력은 제약이 따랐지만 명조 여론정치의 물살을 순조롭게 헤쳐나간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명조의 정책은 이처럼 조선의 주체적인 활동에 따라 변화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사절단의 활동은 전쟁 기간 중에 확장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지만 여기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다음 과제로 돌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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