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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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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58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69 - 193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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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의 불교정책은 전란을 계기로 수립되고 시행되었다. 승려가 전투 병력으로 참여하고, 산성을 수호하고 둔전을 경작하는 등 불교계의 다양하고 적극적인 활동은 선조 이후 조선후기 불교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1595년 선조는 승병의 산성축조와 수호, 둔전의 경작, 승병의 처리문제 등으로 상소를 올린 惟政의 건의에 따라 시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 총섭제 시행과 승과첩 지급은 불교계를 국가의 행정체제 안으로 포함시켜 통제 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래 僧將에게 주었던 호칭이었지만, 이후에는 산성의 수축과 방어, 부역징발과 그 관리를 맡았다. 이 총섭제의 운영은 불교교단의 효율적 통제와 함께 사회경제와 관련된 현안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선과첩 지급 역시 부족한 군사를 보충하고, 승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한편 조선후기 승역의 가중은 불교계에 대한 수탈과 착취보다는 암울한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7세기 이후 자연재해로 인한 생산구조 파괴와 국가재정 부족은 수취체제 개선의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승역의 국역 동원이나 잡역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되는 현상이 지속되었다. 대동법과 균역법의 시행은 승역의 증감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사례다. 결국 조선후기 불교계의 승역에 대한 가중이 수탈과 착취로 인식되는 것이 일면 타당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전란 이후 사회경제적 동향을 염두해 둔다면 불교계 탄압의 차원에서만 인식되기에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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