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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키워드
본 논문에서는 영조의 딸 화완옹주의 정치적 향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화완옹주(1738~1808)는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막내딸로, 영조의 9녀이다.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하여 12세 때 동갑인 정치달과 혼인하여 슬하에 1녀를 두었다. 그러나 딸이 태어난 지 5개월 여만에 죽고, 딸이 죽은 지 한 달도 못되어 남편 정치달이 20세에 요절했다.
화완옹주는 옹주시절 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무척 많이 받았으며, 그에 따라 궁중에서 실세가 되었다. 화완옹주가 영조의 사랑을 많이 받음에 따라 부마 정치달 뿐만 아니라 양자 정후겸도 영조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영조는 딸과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 화완옹주를 배려하여 궁궐로 들어와 살게했다. 그리고 양자로 정후겸을 정해주었다. 정후겸은 정석달의 둘째아들로 당시 16세였다. 그는 대과에 합격하자마자 영조의 사랑과 배려 덕분으로 빠른 속도로 출세하여 당대의 실권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되어 홍인한 등과 함께 후일 정조가 되는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리고 세손을 모해하였다. 그래서 정조가 즉위하자 역적이 되어 28세의 나이에 사사되었다. 물론 화완옹주도 아들 정후겸을 도와 홍인한과 결탁하여 정조를 핍박하였다. 따라서 정조의 즉위는 화완옹주에게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정조 즉위 후 화완옹주를 사형시키라는 대신들과 삼사(三司)의 탄핵이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화완옹주는 종사에 관한 죄를 지은 역적 죄인으로 취급되어 더 이상 옹주로 간주되지 않고, 정치달의 처란 뜻의 ‘정처(鄭妻)’로 낮춰 불렸다.
1778년(정조 2)에 정조는 화완옹주(41세)를 강화도 교동부에 귀양보내고 옹주의 작호를 삭탈하였다. 4년 후인 1782년(정조 6)에는 정조가 몰래 선전관을 시켜 화완옹주(45세)를 강화도 교동 섬에서 육지 파주로 옮겼다. 이를 안 삼사와 대신들은 또다시 화완옹주를 사형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선왕 영조가 사랑했던 사람이며 선왕의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염려하여 끝내 사약을 내리지 않았다. 마침내 1799년(정조 23) 3월 4일에 화완옹주(62세)를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그후 화완옹주는 서울 도성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1808년(순조 8) 5월 17일 71세에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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