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학, 즉 포은 정몽주에 대한 연구는 한국학의 한 구성 부분일 뿐만 아니라, 중국학의 한 구성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전통 우방으로서 같은 문화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귀속할 수 있다. 포은학은 중․한 문화공동체에 속한 문화현상으로, 포은 정몽주는 중․한 양국의 문화발전에 심원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명․청 시기에 포은 정몽주에 대한 인식은 시기별로 전․후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여말선초, 정몽주에 대한 인식은 명나라에 올린 주문(奏文)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런 주문은 조선 왕조의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그 때, 정몽주는 흔히 ‘권신(權臣)’․‘간신(奸臣)’으로 정의되어 있는데, 중국 본토에서는 여말선초 때의 ‘권신설’․‘奸臣說’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세종대부터 편찬하고, 문종대에 성서(成書)한 고려사는 조선왕조의 포은 정몽주에 대한 평가의 변모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중국 본토에서의 포은 정몽주의 평가도 변모하였다.
명나라 만력대(萬曆代)의 진사 전겸익(進士 錢謙益)은 열조시집(列朝詩集)을 편찬할 때, 포은 정몽주의 시를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전겸익은 명말청초 중국 문단의 대표 인물로서 그가 편찬한 열조시집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청나라 순치대(順治代), 강희대(康熙代), 선통대(宣统代)에 여러 번 간행되었다. 열조시집에 수록한 다른 두 조선 사람의 시도 정몽주와 관련이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당시 중국 본토에서 포은 정몽주는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다. 열조시집은 청나라 강희 21년(숙종 8년, 1682년)에 조선에 전입되면서 당시 문인들의 시선을 많이 끌었다.
청나라 중엽, 주이존(朱彝尊)이 명나라 시가를 모은 시가총집 명시종(明詩綜)에서도 포은 정몽주의 시를 필수로 선록(選錄)하였다. 주이존은 명시종에서 정몽주의 행적에 대해 간단히 적었고, 고려사에서 포은 정몽주의 행적을 간과하지 않았던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청나라 말엽, 오경지(吳慶坻)는 조선시록(朝鮮詩錄)의 간행경위를 자세히 소개하였다(초랑좌록(蕉廊脞錄) 권5). 조선시록(朝鮮詩錄)은 총 4책인데, 첫 책에 포은 정몽주의 시를 수록하였고, “그 뒤에 또한 정몽주의 시를 수록하였는데 대개 두 책에 달하였다(其後又錄鄭夢周詩 幾盈二冊).”라고 하였다. 이는 총 4책인 조선시록의 절반 즈음에 가까운 분량이다. 이로부터 포은 정몽주의 중국 본토에서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근현대에 들어서서 중국 본토에 끼친 포은 정몽주의 영향도 20세기 90년대를 기점으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차 아편전쟁’이후, ‘양무파(洋務派)’와 ‘서화파(西化派)’가 흥성되면서 점차 학술․문화 분야에서 지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 본토의 역대 문인과 걸작에 대한 정리는 거의 정체되었고, 포은 정몽주를 비롯한 역외 문인에 관한 연구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인 20세기 50~60년대, 중국 본토에서는 포은 정몽주 연구의 새로운 고조가 일어났다. 이소일(李少一)의 정포은에 대하여(關於鄭圃隱)는 당시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곽말약(郭沫若), 북한 부수상 홍명희, 북경대학교 저명한 사학가 전백찬(翦伯贊), 북경대학교 사학가 주일양(周一良) 등 문인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한국에서 붐을 일었던 포은학 연구 성과가 중국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북경대학교의 루우열(樓宇烈) 교수는 20세기 90년대 초반부터 포은 정몽주 및 한국의 성리학을 연구한 저명한 학자이다. 이로부터 정몽주가 중국으로 사행하는 길에 투속한 곳, 교통로(해로)도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부상되었다. 한국 학계 및 영일정씨 포은공파가 포은 정몽주의 사행 경로와 사행 유적지에 대한 중시는 중국 본토의 학자, 관련 지방 정부기관의 관심을 야기하였다.
당대에 들어서서 중․한 양국관계의 발전과 더불어, 포은 정몽주의 사상․시문․행적에 관한 연구도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되고, 유가 문화에 대한 연구도 더욱 발전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