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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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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8권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33 - 61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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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왜구 침략이 극심해진 것은 1350년(충정왕 2) 경인년부터이다. 왜구의 침략은 해안지방 뿐 아니라 내륙 깊숙이 침구해 들어와 민가를 약탈하고 漕運船의 안전을 위협하는 등 피해가 커서 정부의 재정을 궁핍하게 하는 요소의 하나가 되었다. 왜구의 침구는 1년에 가장 많은 경우 1377년에 29회나 되었다. 왜구가 극성하던 당시 일본의 사정을 보면, 일본은 남북조의 내란기에 해당하여 일본 정부에서도 왜구의 침구활동에 미쳐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특히 남조의 규슈를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왜구 금압의 뜻은 있었으나, 적극적인 진압이 어려웠다. 포은 정몽주가 사신으로 파견된 해는 바로 이렇게 왜구 침구가 가장 극렬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규슈 남조를 평정하기 위한 규슈 탄다이[九州探題]로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 源了俊]이 임명된 것은 한일 우호와 문화 교류에 큰 의미를 차지한다. 포은 정몽주 역시 당시 대표적인 성리학자의 일인으로서, 정몽주의 일본 사신 파견은 일본에서 당대 대표적인 歌人 이마가와 료순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포은 정몽주 이후 2~3차례 사신 파견이 더 있었으나, 곧 일본으로부터의 우호적인 왜구 금압의 노력이 이루어졌고, 포로 쇄환의 문제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현상은 정몽주가 일본에 가서 9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이룬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몽주의 일본 체류기간의 생활을 보여주는 사료는 현재 남아있는 13수의 시 뿐이다. 이를 근거로 정몽주의 생각과 행적을 미루어 볼 수 있지만, 실제로 그의 활동을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미약하다. 그러나, 포은의 13수의 시에서 그의 감회와 사명감, 국가에 대한 충성 등의 회포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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