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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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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9권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147 - 218 (7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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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영·정조년간의 정치세력·정국의 변화와 함께, 시전정책의 하나였던 貢市人詢瘼 중 市廛상인들의 폐막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서울 市廛[=京市]과 송파·누원·수원 場市[=鄕市]간의 문제, 금난전권 행사 주체와 범위문제, 통공의 시행과 釐正의 문제를 주목하였다. 영조 후반에서 정조 초의 시기에는 영조와 왕세자를 중심으로 한 송파 장시의 폐지와 유지 논의가 있었고, 송파 場市[=鄕市]는 유지되었다. 이후 왕세자는 금난전권을 축소·완화하려 했으나, ‘임오화변’이 발발하였다. 영조 40년(1764)과 44년(1768)에는 북한당과 남한당에 의해 ‘갑신통공’·‘무자통공’이 시행되었다. 이후 ‘갑신통공’ 위주의 시전정책이 시행되었고, 정조 초반 홍국영·서명선에 의해 주도되었다. 정조 중반의 시기에는 홍국영세력이 몰락하고, 소론 남당계와 노론 동당계가 정국을 운영하였다. 정조 6년(1782) 경모궁 모민책으로 경모궁 여객주인[=동촌여객]과 누원점[=동북여객]의 대립이 발생했다. 정조 8년(1784) 錢荒의 폐단을 釐正하기 위해, 貢市人散貸策을 시행했고, 정조 9년(1785)에는 鑄錢을 시행했다. 정조 10년(1786)에는 ‘갑신통공’과 유사한 ‘병오통공’을 시행했고, 정조 11년(1786)에는 ‘정미판하’를 시행했다. 더불어 정조 10년(1786) ‘병오년의 喪變’으로 시전정책의 주도권을 행사하던 소론 동당계와 훈신 무장세력이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정조 후반의 시기에는 노·소론·남인의 ‘三相保合’ 정국을 이루었다. 정조 13년(1789) 수원에 현륭원을 천봉하였고, 정조 14년(1790) 수원에 시전을 설치하였다. 이 때문에 서울·수원市廛과 송파·누원·수원 場市[=鄕市]의 대립이 발생하였고, 정조 15년(1791) 6의전 외 일반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하였다. 정조 18년(1794) 6의전 안에서 어물전과 청포전의 1주비를 빼고, 포전을 넣는 ‘갑인통공’을 실시하였다. 영조 후반 정조년간에 시행된 공시인순막을 통한 시전정책의 시행으로 市廛[=京市]과 場市[=鄕市]간의 대립이 해소되었고, 금난전권 행사를 축소·완화하는 통공정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정조는 정치적으로는 노론·소론·남인의 준론세력이 ‘同寅協恭’하는 탕평정치를 지향하였고, 사회적으로는 정부와 모든 백성[=都城民과 鄕民]이 직접적인 대화와 소통을 하는 大同사회의 이상을 구현하려했던 일련의 조치와 함께, 경제적으로는 시전과 장시에 관한 재정적 주도권을 호조와 한성부로 일원화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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