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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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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4권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821 - 85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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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국장의 발인은 국왕 승하 후 5개월 만에 이루어져 국왕의 시신이 모셔져 있는 梓宮을 왕릉에 안장하게 된다. 발인의례가 시작되어 殯殿에서 陵所로 이동할 때 발인행렬이 이루지고, 행렬에 필요한 인적·물적 구성요소의 位次를 發靷班次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國葬都監儀軌에 발인반차를 그려 넣은 發靷班次圖가 첨부되어 있는 것은 많은 물력과 인력이 동원되는 발인반차를 차질 없이 행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므로 발인반차도는 길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國葬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드러나고, 年代記의 기록과 五禮儀의 규정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자료이다. 發靷班次圖를 통하여 확인된 조선 후기 발인반차는 조선전기의 『國朝五禮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구성요소들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는 국상의례의 변화상과 같이 禮學의 발달과 당대의 정치상황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변화의 의미가 가장 큰 발인반차는 숙종국장에서 볼 수 있는 백관의 喪服 變化이다. 숙종국장에서는 왕위승계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노론예론 선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발인반차가 시행되었다. 영조대 『상례보편』의 특징은 節用과 愛恤이라는 두 가지 실천적 정신 위에 왕통의 정통성 확인과 부모에 대한 의리인 孝, 그리고 魂·魄의 의리구현이었다. 이러한 요소는 송명거와 망촉의 생략, 증옥백요여의 추가, 화철롱과 초롱의 추가배치 등으로 발인반차에 반영되었다. 영조의 국장에서는 보편의 규정과 달리 요여들이 오히려 늘어났는데, 이 요여들인 尊號冊寶腰輿 5개와 几杖架子는 국왕권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요소였으므로 정조는 왕권의 확립 차원에서 선왕의 威儀를 강조하며 발인반차를 구성하였다. 정조의 발인반차는 구조가 압축적으로 변하였는데, 이는 정조 치세 25년 간 다수의 行幸에서 축적된 행렬방법의 발전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순조는 강력한 왕권을 위해 개혁을 추구하였던 정조의 통치제도 연장선에서 정조국장을 치렀고, 발인반차의 구조적 변화와 軍兵의 증가를 가져왔다고 본다. 순조의 발인반차는 유교적 상례의 기본적인 법칙에 어긋나는 발인반차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곡궁인과 수릉관·시릉관·종척집사의 위치가 대여의 앞으로 이동하여, 哭하며 따른다는 법칙에 어긋나는 구조로 변화한 것이다. 哭宮人의 行帷가 시야를 막고 흐름을 끊어지게 하여 수릉관·시릉관 등 各 臣에 대한 검측이 어려워 불편하다는 이유로 禮制가 변화하였지만, 세도정치기의 혼란한 정국에서 禮制는 중요한 정치 사안이 아니었으므로 논의과정도 없었다. 이렇게 변화한 발인반차 구조는 이 후 고종의 발인반차에서도 확인 되는 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정조대 이후 국왕권의 강화와 맞물려 외척의 세력이 강화되는 정치적 모순이 국가의 몰락을 자초하였고, 의례 역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외형적으로는 화려하고 왕실의 존숭이 유지되는 듯하지만, 발인반차라는 상례의 절차에서 드러난 것처럼 왕조례는 형식화 되어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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