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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교육사상연구회 교육사상연구 교육사상연구 제19호
발행연도
2006.1
수록면
67 - 10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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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제주삼읍 향교의 신창, 중창, 이건의 회수를 보면 제주향교가 신창 1회, 중창 6회, 이건 5회, 정의향교가 신창 1회, 중창 1회, 이건 2회, 그리고 대정향교가 신창 1회 중창 5회 이건 1회로 조사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신창은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보급하기 위하여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각 1회씩 이루어진 것이며, 중창은 비가 새거나 벽이 허물어져 보수할 필요가 있을 때 주로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이건은 제주향교의 경우 화재로 1회 옮긴 것 외에 그 이유의 모두가 풍수지리적인 것이었다. 사학인 서원의 융성으로 향교가 급속하게 폐이(廢弛)되고 지방교육은 서원이 대행하다시피 하던 때에 제주삼읍 향교의 중창과 이건이 빈번했던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제주도의 경우는 육지부와는 달리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실직(實職)을 받지 못한 자들과 과거에 응시하지는 않았으나 양반 가문 출신의 자제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 향교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이들에게는 향교에 출입한다는 사실 자체가 특권의 상징이었으며 다른 지방과는 달리 이들은 향직(鄕職)을 독점하였다. 향직은 제주도의 경우 양반임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직역(職役)이다. 어쩌면 그만큼 양반의 경우 중앙관직을 얻을 기회가 적고 과거를 통과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에 향교에의 직책(職責)과 향직을 중요시 여기고 신분유지의 수단으로 파악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향교는 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신분유지처로서의 기능을 했으며 그래서 중창과 이건도 빈번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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