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불교미술사학회 불교미술사학 불교미술사학 제15권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71 - 100 (3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실상산문의 개산조 홍척은 흥덕왕의 후원을 받아 828년에 실상사를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척은 서당지장에게 심인을 증득하고 귀국한 후, 흥덕왕과 선강태자로부터 귀의를 받았다. 이는 흥덕왕이 지역의 반란세력들을 견제하고 지역의 민심을 위무하기 위해서 선종 승려들을 우대한 정책과 관련이 있다. 특히 실상사가 세워진 남원은 김헌창의 난에 동조한 세력들이 많았던 곳으로 특별한 관리가 요구되었다. 흥덕왕은 남원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홍척을 국사로 삼고 사찰의 창건을 후원한 것으로 보인다. 홍척이 실상사를 창건하였다면 그의 제자 수철은 실상사의 사세를 본격적으로 확장하였다. 「심원사수철화상탑비」에 의하면, 수철은 명산승지를 순례하다가 836년경에 지리산으로 돌아와 실상사를 확장하였다. 이때 수철은 문성왕의 후원을 받아 사찰을 확장하면서 철불도 함께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상사 철불에서 보이는 대의 표현이 8세기 후반의 백률사상과 810년의 기년명을 가진 창녕 인양사 조성비상에서 보이는 대의 표현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실상사 철불은 858년의 기년명을 가진 보림사 철불보다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 철불의 조성배경은 정치적인 상황과 관련이 깊다. 흥덕왕이 붕어하고 문성왕이 즉위하기까지 왕위찬탈을 목적으로 하는 반란이 세 차례나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인겸계에서 예영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집권에 성공한 예영계 문성왕은 지방의 반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흥덕왕처럼 선종 승려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특히 남원은 서남해안에 잔존하는 반 왕실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신라 왕실의 입장에서는 이 지역을 통제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문성왕은 민애왕을 지원한 홍척 대신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시켜줄 인물로 홍척의 제자인 수철을 선택하였다. 수철은 봉암사 철불을 조성한 예처럼, 당시 빈번하게 일어났던 전쟁으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고 나아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망자의 혼을 달래기 위한 목적에서 철불을 조성하였을 것이다. 금동이 아닌 철로 불상을 조성한 이유는 장보고 선단의 몰락과 연관이 깊다. 당시 해상중계무역을 장악한 장보고 선단은 중국에서 대량의 동전을 확보하여 신라와 일본의 사찰에 공급하였다. 841년 장보고의 죽음과 844년 당 무종의 회창폐불을 계기로 장보고 선단을 통한 동의 수급이 이전처럼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실상사 대형 철불의 조성은 남원 근방에 산재한 대규모 야철지와도 관련이 있다. 지표조사에 의하면 운봉고원은 우리나라에서 철 생산유적이 가장 밀집된 최대 규모의 철 산지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840년부터 856년 사이에 조성된 실상사 철불은 동이 아닌 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실상사 철불의 존명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약사불로 본 견해는 수철이 약사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에 대한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약사전은 󰡔청계집󰡕을 통하여 조선시대에 세워진 전각으로 드러났다. 즉 고려시대 병화로 인하여 버려졌던 철불이 당시 세인들의 통습에 따라 약사불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아미타불로 본 견해는 복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철제 손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신라하대 하품중생인을 결한 불상의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철불이 후보되는 과정에서 철제 손이 복장에 납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상사 철불의 존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상사사적」의 내용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사적기에는 실상사 철불의 존명이 원래 노사나불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흥미롭게도 같은 선종사찰인 보림사에도 2m가 넘는 대형의 노사나불이 조성되었다. 또한 선종사찰인 삼화사에서도 노사나불이 조성되었다. 실상사 철불과 삼화사 철불은 존명 이외에도 수직으로 길게 뻗은 눈, 짧은 코, 두툼한 입술 등의 상호와 두 팔의 위치가 상당히 유사하다. 현재 남아있는 두 팔의 위치로 볼 때, 실상사 철불은 복원된 삼화사 철불과 같이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결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쪽으로 향한 여원인 계통의 수인을 결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상사와 삼화사 철불에서 나타나는 유사성은 각각의 철불을 조성한 인물 간의 영향관계를 통하여 그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즉 삼화사 철불을 조성한 인물로 추정되는 사굴산문의 행적이 수철과 같은 동원경 복천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점과 수철과 행적이 나란히 신라하대 4대 국사와 5대 국사를 역임하였다는 점에서 실상사 철불이 삼화사 철불의 조성에 하나의 모본으로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실상사나 삼화사와 같은 선종사찰에서 노사나불을 조성하게 된 이유로는 신라하대 선종 승려들이 화엄종을 먼저 접하고 교종사찰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점, 선종 승려들이 화엄교학을 겸하여 자신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는 점, 입당한 선종 승려들이 화엄종의 본산인 오대산을 참배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선종 승려들은 화엄종의 주존인 노사나불을 조성하여 선종사찰에 봉안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실상사 철불은 원 봉안공간에서 현재의 약사전으로 이운되었음이 분명하다. 철불이 봉안된 약사전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사찰이고, 발굴조사 결과 약사전 아래에 고려시대 건물지가 나타났다. 또한 약사전 중수공사 과정에서 드러난 석대좌는 철불을 단순히 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성된 것이다. 실상사 철불의 원 봉안공간를 추정하기 위해서 신라하대 철불들의 크기와 철불들이 안치된 금당지의 크기를 비교․검토하였다. 이를 통하여 실상사 철불은 현재의 보광전 아래 건물지에서 주존으로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실상사 철불을 기점으로 대형의 철불들이 연이어 선종사찰에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실상사 철불에 대한 연구는 신라하대 철불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66)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