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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28호
발행연도
2013.1
수록면
321 - 355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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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 역사학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근대역사학 성립과정에서 일본사를 중심으로 주변민족의 역사를 일본사의 타자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滿鮮史는 일본사를 중심으로 조선과 만주의 역사를 재구성한 것이라 하겠으며, 그렇기 때문에 만선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속에서 일본사의 위상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 논문은 대표적인 만선사학자인 稻葉岩吉의 연구 과정을 통하여 만선사의 체계화 과정과 그 속에서 일본사의 위치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에 부임하던 1920년대 이전 稻葉은 만선사가라기 보다는 청조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동북아의 역사를 대륙과 일본의 關係史라는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가운데 주된 관심을 淸朝와 滿洲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부임과 함께 만주와 더불어 조선과 그 주변을 연구하며 만선의 불가분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稻葉 역시 당시 일본학계의 풍토가 그러했듯이 주로 古代史 연구에 집중했지만 다른 일본인 학자들처럼 韓日關係 보다는 자신이 이전부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대륙과 조선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다. 당시 稻葉은 民族的·政治的·經濟的 측면에서 만선의 불가분을 주장하는 한편 半島에 영향을 준 것은 만몽의 민족보다는 漢族이라며 중국의 영향력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역사에서 만주보다 중국의 영향력을 중요시하는 것은 만선이 불가분이라던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 이 시기 만선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은 사료의 해석이라기 보다는 전달에 가까웠고, 조선방면의 민족과 漢族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으로 조선과 그를 둘러싼 주변의 역사를 어떠한 구조에 입각하여 통일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1920년대 稻葉의 연구는 조선과 그 주변의 관계, 특히 조선에 미친 漢族과 그 문화의 영향력에 대한 것이라 하겠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만선사라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양상에서 벗어나 조선과 그를 둘러싼 주변에 대한 통일적인 歷史像을 제시하고자 했다. 稻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全局上 注意”를 기울여 조선의 역사를 동양사의 일부로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民族 혹은 勢力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이 아닌 東胡系 民族, 漢族, 蒙古族의 3자의 세력관계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조는 契丹이 흥기하고 新羅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만선분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稻葉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稻葉 역시 7세기 이후의 역사를 설명할 때는 滿鮮을 통일적으로 사고하기 보다는 漢族의 왕조, 契丹이나 女眞과 같은 북방민족, 半島의 민족 등과 같이 개별적으로 바라보았으며 漢族에 의한 以夷制夷에 따른 滿鮮分離의 과정으로 서술하는 한편 만선의 접촉이 있던 17세기의 역사적 전개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도 稻葉의 연구는 滿鮮의 불가분성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女眞과 朝鮮의 접근을 높게 평가하는 양태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오히려 稻葉이 연구 초기부터 말년까지 시종일관 변치 않고 주장했던 것은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서 일본의 위상에 관한 것이었다. 연구의 진전에 따라 稻葉은 자신의 주요 연구대상을 淸에서 조선과 그 주변, 만선으로 이동했지만 언제나 대륙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부심했다. 또 연구과정에서 과거 자신의 견해를 부정하기도 하지만 대륙의 영향을 받아 개국과 동시에 强國이 된 일본의 역사적 위상에 대해서는 변치않는 신념을 나타내었다. 1920년대 대륙과 일본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던 측면을 강조하던 稻葉은 1930년대 이러한 논의를 반복하면서도 대륙이 무시할 수 없었던 해양의 강자로서 일본의 위상을 2세기까지 소급하는 한편 그것이 지속되었다는 歷史像을 제시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위상에 대해서는 古代를 넘어 稻葉 자신도 滿鮮分離가 가속화되었다며 자신이 제시한 만선사적 구조로 설명하지 못한 7세기 이후의 역사에도 관철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稻葉이 체계화했던 만선사라는 것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나타나는 것으로 稻葉 스스로 인정하듯이 7세기 이후에는 존재할 수 없는, 오히려 滿鮮分離史라고 하는 것이 실체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다. 또 滿鮮史를 구조화하며 漢族, 蒙古族, 東胡系 民族의 관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가 제시하는 주요한 국면 – 한사군의 설치, 삼국의 각축,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모두 일본의 개국과 해동의 강자로서 일본의 위상을 설명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稻葉이 추구했던 ‘滿鮮史’라는 것은 7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역사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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