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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26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317 - 353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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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고대 역사서 편수에 활용되었던 문서나 도서들의 생성, 즉 사료의 생성과정과 이를 정리 보관하는 방법 및 열람의 방법을 탐색하여 이 국가 문서들이 역사서의 편찬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알아보았다. 문서나 도서를 수집하여 보관, 열람하는 제도를 이 글에서는 ‘藏書制度’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이 글의 연구 시기는 주로 漢代를 중심으로 하되 이후의 변화를 비교하기 위하여 위진남북조·수·당대를 포함하였다. 역사서에 왕들의 기록만이 아닌 다양한 사회상을 서술하기 시작한 사람은 사마천이다. 『사기』를 저술하기 위해서 사마천이 활용한 사료는 국가의 공식적 기록 외에도 다양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마천은 태사령이라는 관직을 지내면서 국가의 문서도적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였기 때문이 다양한 사료를 접하고 활용하였던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였던 전한대에는 많은 장서부들이 있었다. 우선 국가의 중요문서를 보관하던 금궤(金櫃) 석실(石室)부터 외조(外朝)에 있던 태상(太常), 태사(太史), 박사(博士) 관부의 장서가 있었다. 또 궁전 내에는 연각(延閣), 광내(廣內), 비실(秘室), 천록각(天祿閣), 석거각(石渠閣), 난대(蘭臺), 기린각(麒麟閣) 등이 있었다. 사마천은 이 장서부들의 전적을 모두 섭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귀중본을 보관하는 금궤석실의 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고 하니, 다른 장서들을 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태사령에게는 군국의 상계문서가 가장 먼저 전달되어 군국의 사정을 그대로 역사서에 반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한대에 비해 후한의 장서시설은 축소되었다. 벽옹(辟雍), 동관(東觀), 난대(蘭臺), 석실(石室), 선명(宣明), 홍도(鴻都) 등이 후한대의 장서부인데, 이 중 벽옹, 홍도 등은 교육을 펼치는 곳으로 전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경전을 위주로 한 전적이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고, 동관은 역사서가 저술된 곳이기는 하지만 본래의 기능이 태학이나 홍도와 같은 교육 장소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역사서를 저술하였던 이유는 名儒들을 머물게 하여 찬수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漢書』가 저술된 난대는 국가의 공문서가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난대에서의 사서의 찬수는 유리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통사를 저술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많은 전적을 열람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후한 이후 전적의 보관은 비서에서 전담하고 역사서술이 비서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비서성에서 분파된 저작성 등으로 이관되었다. 또한 사마천의 경우는 그 자신 태사령으로써 천문, 역법을 관장하였고, 문서관리를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계문서도 수신하였으므로 스스로 사료를 생성하고 관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한 이후에는 주로 황제의 근시지관이나 내조에 속한 관부에서 주로 역사서를 저술하였으므로 군주의 의사가 쉽게 반영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사서의 편찬과 사서의 내용은 군주의 강력한 간섭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자유로운 역사서술을 방해하였다. 이 과정에서 역대 왕조의 장서시설은 점차 궁정 안으로 집결되었으며 이 또한 관찬역사서의 찬수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후대로 갈수록 전적으로 모으고 관리하는 장서부가 통합되어 갔다. 秘書省이나 集書省으로 문서의 보관과 정리가 단일화되면서, 관리라는 측면에서는 효율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다양한 역사서의 저술은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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