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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고전연구학회 韓國古典硏究 韓國古典硏究 제29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267 - 311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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迂拙齋 朴漢柱(1459-1504)는 金宗直의 門人으로, 조선전기 지성의 한 면목을 엿보게 해 줄 뿐만 아니라 初期士林派 문인의 이미지 형성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 준다. 박한주 생애자료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그의 외손 周博이 찬한 行狀이다. 이 글에서는 아직 특정 이데올로그로 규격화하지 않은 느슨한 박한주를 볼 수 있다. 현양사업의 추이와 관련해서 살펴보면, 먼저 임란 직전 鄭逑가 함안의 묘소를 정비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그는 충신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충신의 표상 위에 도학자의 표상이 더해지는데 후자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난후에는 밀양의 향촌질서를 재정비하는 작업과 연동되어 현양사업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박한주는 김종직과 연결되어 도학적 관점에서 재평가되었다. 17세기 중반을 전후해서는 박한주 현양이 禮林書院․閭表碑등 사회적 표식의 형태로 추진되는 가운데 김종직 도학의 嫡傳化가 시도되었다. 18세기 현양사업의 특징은 박한주의 족손 朴壽春과 결합되어 전개된 것이다. 그중 南岡書院 請額疏는 국가적 공인을 받기 위한 노력으로, 道統의 관점에서 박한주의 위상을 재정의하였다. 도학자 박한주를 만드는 데는 현양사업의 주체들 즉 密陽 士林의 의지, 밀양 박씨 문중의 노력, 그리고 退溪-寒岡 연원 학파의 협조가 공동으로 작용했다. 유의할 것은 도학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김종직이나 金宏弼․鄭汝昌과 과도하게 결합, 명명되면서 오히려 박한주의 실체가 왜소하게 제약되었다는 점이다. 박한주가 남긴 작품을 돌아보면 ‘유교국가의 비전과 도덕의 사회적 실현을 위한 분투’라는 주제의식을 문학적 역량을 다해 형상화하고 있는 ‘글 잘 쓰는 사람’ 박한주를 만나게 된다. 經術과 文才 어느 한쪽으로는 그의 온전한 얼굴을 복원할 수 없다. 性理 학문을 익히는 박한주, 道․佛書도 버리지 않은 박한주, 󰡔楚辭󰡕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잘 썼던 박한주. 이것을 아우른 모습이야말로 당대 생생하게 살아있던 실존으로서의 박한주였으리라. 우리가 기록/기억하고 있는 그들은 도학, 도통, 문묘, 서원의 이름으로 기획된 얼굴이 아닌지, 또 지금 우리는 다시 그들을 ‘초기사림파’라는 이름으로 분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일이다. 특히 박한주의 경우 김종직과 김굉필․정여창에게 강하게 결박된 채 기록/기억되어 왔으므로 이중으로 왜소화(또는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박한주 연구에서 이 점이 각별히 유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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