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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세종연구소 국가전략 국가전략 제20권 제2호
발행연도
2014.1
수록면
69 - 10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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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 이후 중국의 외교정책은, 경제건설을 위한 우호적인 국제환경의 조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 또한 이러한 중국외교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전쟁의 재발방지’와 ‘조선반도의 안정적인 현상유지’는 중국의 대북정책의 목표였으며, 이의 실현을 위하여 중국은 북한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특히 1956년 9월, ‘8월 종파사건’에 대한 중소의 공동개입은, 중•조 간의 비대칭 관계의 상징이었다. 1956년 11월 초 김일성과 비슷한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던 헝가리에 대한 소련군의 무력개입과 뒤이은 헝가리 임레나지(Imre Nagy) 정권의 붕괴는, 김일성의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이에 김일성은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유엔을 초청”할 것을 중국과 소련에 제안하고, 동시에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 요구로 맞섰으며, 양국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김일성의 철군요구에 마오쩌뚱은 대화를 통해 양국간의 긴장을 완하시키는 소위 ‘폴란드식 해결’ 방법을 선택하였다. 1956년말 중국은 중국인민지원군 철수를 결정하고, 1957년 1월 소련의 동의를 얻었다. 1957년부터 중국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 제공을 재개하고 일체의 정치적 간섭을 중지하면서, ‘김일성 달래기’에 나섰다.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마오쩌뚱은 북한에 대한 내정 간섭의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를 통보함으로서 중조관계는 밀월기에 접어 들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에게 집중된 권력분산과 집단지도체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던 ‘8월 종파사건’과 ‘중소의 공동간섭’은 최초 의도와 반대로 김일성 체제 강화로 그 막을 내렸다. 1963년 최용건이 마오쩌뚱에게 말한 것처럼, 북한은 소위 ‘제2의 해방’이라고 부를 정도로 1956년을 기점으로 중소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중조간의 비대칭성 해소의 길로 접어들었다. 곧이어 발생한 중소분쟁으로 김일성은 소위 ‘꽃놀이 패’를 쥐게 되었으며, 동시에 김일성 유일 독재 체제의 구축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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