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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대학교 한국-시베리아센터 한국 시베리아연구 한국 시베리아연구 제19권 제1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03 - 148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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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부랴트 공화국에서 조사한 부랴트인 구술생애사 자료를 기반으로 소련의 대조국전쟁 전후(前後) 시기 부랴트인의 국민정체성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1929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반 부랴트 캠페인은 부랴트인이 ‘민족’을 버리고 ‘국가’를 강제적으로 선택하게 함으로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두 집단정체성이 경합의 대상이 되지 못함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에 대다수의 부랴트인은 소련 내부의 타자이자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러시아인과 자신들을 명확히 구별해냄으로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드러냈지만, 동시에 이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련인 국민정체성도 확립되어 갔다. 대조국전쟁 시기 대부분의 젊은 부랴트인이 징병되어 희생되고, 후방에서도 어려움이 지속되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러시아인 대 부랴트인’이라는 민족개념의 이분법적 대항공식이 사라지는 대신, 국가 개념을 기준으로 하는 ‘외부의 타자’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소비에트 군대는 어느새 ‘우리 소비에트 군대’가 되었고 전쟁의 승리는 ‘우리 소련의 승리’가 되었다. 대조국전쟁에 대한 부랴트인의 이러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부랴트인의 소련인 국민정체성이 강화되는 정치적 자원이 되었다. 1930년대에 주도적으로 부랴트인 숙청을 지휘했던 스탈린은 전쟁 이전까지 부랴트인에 의해 ‘나쁜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나, 대조국전쟁 승리 이후 그는 부랴트인 사이에서 훌륭한 지도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스탈린 주도의 ‘전쟁 승리’는 집단 기억의 재생산을 위한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되면서 부랴트인 국민정체성의 확립과 강화에 영향을 주었다. 전쟁 후 소련은 참전용사에 대한 특별대우, 학생들의 소련 국가 외우기, 지역에서의 주기적인 공산당 컨퍼런스 개최, 대조국전쟁 추모행사, 기숙학교 운영 등을 부랴트인 국민정체성 재생산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소련 외부의 타자로 간주된 독일일 및 일본인 전쟁 포로를 직접 경험한 일부 부랴트인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들의 집단을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민족’ 보다는 소련이라는 ‘국가’를 우선시하였다. 전쟁을 통해 경험한 포로와의 사회적 접촉과 적국(敵國)의 상품 사용을 통해 타자와의 경계는 더욱 명확해졌으며, 타자와의 경계는 자신들이 소련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었다. 반면, 리투아니아인과의 접촉은 적국 포로와의 ‘구별 짓기’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부랴트인은 소련이라는 ‘국가’를 기준으로 리투아니아인을 자신들과 같은 소련인으로 구분하였다. 부랴트인의 이런 범주화는 ‘민족’이 아닌 ‘국가’를 우리와 타자 집단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었으며, 소련인 국민정체성 재생산의 메커니즘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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