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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육군군사연구소 군사연구 군사연구 제133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9 - 47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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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지역과는 달리 창녕지역에는 한 지역집단을 통합한 지배집단의 고분군인 중심고분군이 두 군데서 확인된다.계성고분군(桂城古墳群)과 교동․송현동고분군(校洞․松峴洞古墳群)이 그것이다.그간 고고학과 역사학계에서는 두 중심고분군의 존재를 지배집단의 병존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교체인가 하는 문제와 5세기~6세기 전반의 창녕이 과연 신라 소속의 소국인가 아니면 가야의 독립소국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이 논문에서는 첫째로 전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창녕지역에는 소국의 지배집단이 이원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한정된 고고학적인 자료를 가지고 지배집단의 교체를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둘째로 이 연구에서는 5세기~6세기 전반 낙동강 이동지역과 동해안 일원의 고분에 등장하는 새로운 물질문화의 양상을 신라화(新羅化)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그 결과 창녕의 소국이 신라에 편입된 시점에 대한 그간의 주장은 전체적인 양상을 검토하기보다 자설에 유리한 특정 물질문화요소를 선별적으로 제시하여 도출된 견해라고 비판하였다.계남리(桂南里)1․4호분(號墳)의 구조가 동시기 경주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의 墓槨型式(모곽형식)을 따른다는 점,창녕양식토기(昌寧樣式土器)가 신라양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그리고 신라의 스타일과 제작기술을 적극 모방수용한 금공품(金工品)을 자체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은점 등에서 5세기 후반의 창녕지역 고분은 범신라(凡新羅)문화(文化)에 포괄되며 신라와의 위계적(位階的)인 정치적(政治的)관계(關係)를 배제하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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