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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한국한문학연구 제68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363 - 402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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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허균의 마지막 시집인 『을병조천록』을 중심으로, 허균의 양명좌파 수용 여부와 수용 시기를 고찰한 것이다. 논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친상에 기생과 어울려 불륜을 저질렀다는 기록은 政敵인 李弘老가 만들어낸 중상모략에 기반한 것으로 허균의 실제 행적과 일치하지 않는다. 허균은 위선적인 예교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도덕 감정을 드러내는 형식인 예 자체는 존중하였다. 둘째 허균은 陽明左派 李贄의 저작을 1608년 부안 은거기 이전에 접하였고, 이지의 사상과 문학을 지지하였다. 허균은 부안 은거기 무렵부터 「豪民論」, 「南宮先生傳」 등 혁신적인 사유와 파격적인 형식을 지닌 작품을 집중적으로 창작하였다. 셋째 李植은 허균을 양명좌파 문인이자 『洪吉童傳』의 저자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직접 목도한 사실에 근거한 신뢰할 만한 기록이다. 이식은 허균이 부안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허균과 교유가 있었는데, 허균의 의식이 이지의 영향으로 격변하고 있던 시기에 허균의 언행을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글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중요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넷째 허균은 前後七子의 擬古 문학이 아닌 양명좌파의 革新적인 문학을 지지하였다. 허균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허균의 시는 세 번의 변화를 겪었는데, 의고적인 문학에 경도되었던 시기는 젊은 시절에 국한된다. 허균이 40대 이후 지향한 문학은 양명좌파의 영향을 받은 공안파 문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다섯째 허균은 유가의 太極論을 부정하고 太極, 形氣를 초월한 老佛의 道를 세계의 근원으로 보았고, 聖人과 凡人, 儒敎와 老佛, 中國과 夷狄의 구분이 무화된 세계를 지향하였다. 결론적으로 허균은 古人, 성인, 유교, 중국을 추종하는 비루한 광대의 삶을 버리고 자유와 혁신의 길로 나아가고자 한 豪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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