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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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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최근까지 많은 연구에서는 연개소문이 664․665․666년 가운데 어느 시점에 사망하였고, 고구려 대내외 정세에 급격한 변동이 초래하였다고 이해해왔다. 그러나 664년 7월에 신라가 고구려의 突沙城을 멸하였지만 연개소문이 어떠한 대응 조치도 보이지 않았고, 석 달 후인 10월에 遺言을 남겼다는 기사까지 확인된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운 사건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664년 여름 즈음부터 일정한 死後 對備策을 마련하였고, 당시 정국 주도세력 또한 이를 충분히 예상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연개소문은 650년대부터 장자 남생을 주축으로 한 후계구도 정립에 적극적이었으며, 남생이 莫離支兼三軍大將軍이 되었던 661년에는 男建․男産과의 共助體制가 큰 틀을 갖추었다. 따라서 연개소문-남생 형제의 권력 승계는 어려움 없이 매듭지어졌으며,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 내정이 급변 사태를 맞이하였을 공산은 크지 않아 보인다.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보장왕의 상징적 권위가 새삼 부각되었고, 정치․외교적 역할도 이전보다 확대되었던 흔적이 포착된다. 그러나 이는 연남생 형제의 묵인 혹은 동조 아래 가능한 일이었으며, 보장왕이 단독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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