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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38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205 - 23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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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중·후반기에 있어서 사찰건축의 특징은 임란 이후의 전국적인 중건불사 과정에서 사동중정형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가람배치가 정리되었다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가람배치는 당시 유행했던 불교의식집의 간행과 더불어 그에 의거한 대규모의 야외의식을 수행하기위해 선택되었던 방식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 논고에서는 기존과 달리 이러한 가람배치가 먼저 형성되고 난 이후에 그 공간에 맞춰의식집이 정비되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고찰해보고자 하였다. 우선 임란 후 전국적으로 중창불사가 일어나게 되었을 때 투입되었던 목수 및 장인들은 임란 이전에 있어 사찰건축이 침체기였음을고려해볼 때 불사건축에 참여했던 경험이 매우 적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오히려 임란 이전의 조선사회에 있어서 비교적 활발히 일어났던 서원과 향교건축의 유행을 통해 장인들은 건축기술을 계승해 나갈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양상이 사찰건축 재건에 반영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사동중정의 배치에 있어서 사찰의 법당은 서원의 명륜당, 동·서승당은 동·서재에 대응되고, 두 건축 모두 입구에 누각을 설치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니게 된것이다. 아울러 건축제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행해졌던 의례 역시 유교적 예제, 특히 16세기부터 조선사회에 보편화되었던 󰡔주자가례󰡕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결과로 불교의식집에나타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보았다. 첫째, 조선전기의 의식집은 단순하게 의식에 필요한진언을 열거하는 수준이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작법의 절차를 상세히 언급하고 그 과정에서의역할분담까지 분명하게 언급하게 되었는데, 이는 󰡔주자가례󰡕의 서술방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는 향공양이 불전에 상주하는 부처에 대한 6공양의 하나였던 조선전기까지의예법과 달리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제사에서의 초혼의식에서 향이 의미하는 것처럼 부처를강림하게 하는 매개체로서 인식되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로는 마치 제사에서처럼 의례의 마지막 순서로서 부처를 배웅하는 절차가 삽입된 점을 들 수 있다. 원래 부처는 불전에 상주하는 존재였던 개념이었지만,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제사에서 조상을 초대하고 배웅하듯이 부처를대한다는 점에서 원래의 부처에 대한 개념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사동중정형 가람배치의 중요 요소 중의 하나인 누각은 대규모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로 인식되어 왔지만, 한편으로는 대규모 의식을 축소하여 중심 불전 안에 상·중·하단을 설치하는 것이 이 시기 불전장엄의 특징임을 지적한 견해도 있음을 고려해볼 때 단순한 의식용공간으로만 해석하기는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관아, 혹은 향교 및 서원에서 관료 및선비들의 휴식공간으로서 전유되던 문화적 공간을 사찰후원세력이었던 신흥상인 및 중인계층이향유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찰중건시에 누각건축을 선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산천을 유람하던 유학자들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찰 방문을 유도하여사찰 운영을 활성화하고자 했던 불교계 나름대로의 정책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를 정리하자면 결국 조선 중·후기로 넘어오면서 사찰건축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궁궐건축을 표방하던 것에서부터 사묘(祠廟)건축을 표방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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