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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38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179 - 204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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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에서 조선후반기 제1기는 주변국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훼손된 건축을 복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인 재건의 시대이다. 국가적으로는 도성과 종묘, 사직 그리고 궁궐에 이르기까지 기간 시설을 모두 재건해야 했으며, 불교 교단으로서도 약탈과 방화로 파괴된 사원을 복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청허휴정은 국난을 당하여 불교계가 국가 수호에 앞장서도록 지휘하는 가운데 제자인 송운유정으로 하여금 승군대장으로 활약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왜구에게 침탈된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수호하도록 부촉하였다. 통도사에서 가져온 진신사리 중 일부는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의 새로만든 석종에 보관하고 기념비를 세웠으며, 나머지는 유정에게 주어 양산 영취산 통도사 금강계단에 새로 석종을 만들어 다시 보관하게 하였다. 왜란 이전부터 있었던 사리전은 사리각이라는 이름으로 통도사 계단 앞쪽에 17세기 중반 재건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달성 용연사에도 사리 일부를 보장하기 위한 석종과 석가여래부도비가건립되었고, 18세기초에는 통도사 사리탑을 100여 년만에 수리하고 사리탑비를 세웠다. 100여 년에 걸친 사리 수호 활동의 결과 원래의 진신사리 보장처인 통도사 금강계단이 석종과 조각을 갖춘사리탑으로 변모되었고, 계단 앞에 단층 불전 형식의 사리각이 세워져 배전 역할을 하게 되었다. 통도사의 사리는 태백산 정암사 석탑과 용연사 석종에도 보장되었으며 이 두 곳에도 훗날 배전이세워지게 되었다. 통도사 사리는 고려말 왜구 침입 때에도 개경 송림사로 옮겨졌다가, 조선 태조대에는 흥천사 사리탑에 봉안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는 3층 사리각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탑을 봉안하여 사리각내부에서 계단을 오르면 사리탑 안의 사리를 배관할 수 있었다. 세종대에는 3층 사리각이 구조상의 결함으로 붕괴될 우려가 생기자 사리각을 헐고 대신 단층 전각을 석탑 앞에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는 사리탑 앞에 단층 건물 형식의 배전을 지으려던 최초의 시도였는데, 세종대에는 통도사 소장 풍탁 명문에서 보이듯 금강계단 앞에도 사리전이 존재했었다. 세조대에는 오대산 상원사에 행차했던 세조가 고려말 이래 진신사리 보장처로 여겨져 온 중대보궁에 올랐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존 중대 ‘적멸보궁’의 속칸에서 보이는 다포계 건물이 이때에 지어진 것이며, 건물 뒤편에 있는 지궁형 보장처에 대한 배전이 적어도 세조대부터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조선전반기에 보이는 사리각의 두 형식 가운데 통도사와 오대산 중대에 세워진 단층 불전형 사리각이 조선후반기로 계승되고 후에 적멸보궁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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