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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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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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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열상고전연구 제68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77 - 122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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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명나라는 후금의 본거지 허투알라(赫圖阿拉)를 소탕하기 위해 4개의 대규모 부대를 동시에 출격시켰다. 강홍립(姜弘立)을 총사령관으로 한 1만 3천명의 조선군은 동쪽에서 허투알라로 진격하는 유정(劉綎)의 부대에 소속되었다. 후금의 기마부대에 유정의 본군이 먼저 궤멸된 뒤, 뒤따르던 김응하(金應河)의 조선군 좌영(左營)도 전멸했다. 전투를 회피한 강홍립이 후금 군대와 강화 교섭에 나서자, 조선군 감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선군 진영에 남아있던 명나라 장군 교일기(喬一琦)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홍립은 항복하여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고, 그의 부대원들은 탈출하거나 교섭으로 조선에 복귀하였다. 생존자들이 귀국하면서, 교일기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공식 보고와 다른 내용의 증언이 나왔다. 「최척전(崔陟傳)」에서 강홍립의 종사관 이민환(李民寏)이 생존을 위해 교일기를 후금군에 넘겨주었다는 증언이 나오자, 악인으로 몰린 이민환의 형 이민성(李民宬)은 즉각 2편의 시를 지어 이를 격렬하게 부정했고, 이민환은 1년 7개월 동안의 포로 생활을 「책중일록(柵中日錄)󰡕으로 정리하면서 그 책임을 회피했다. 강홍립의 개인 비서였던 권칙(權侙)은 1630년에 「강로전(姜虜傳)」을 지어 교일기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으로 강홍립을 특정했다. 정묘호란(1627) 이후 확산된 강홍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이는 정론처럼 굳어졌다. 김응하와 조선군의 용맹함과 전투 의지를 확인시켜주는 ‘증인’이었던 교일기가 이제 조선군의 배신으로 희생 당한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군을 감시․감독하던 ‘상국(上國)’의 장군이 아니라 ‘우리’가 보호해 주어야 했던 대상,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절을 지킨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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