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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신라 제49대 왕인 헌강왕은 아버지인 경문왕의 재위 중에 태어났다. 그는 부왕의 배려속에서 이른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고, 王才로서 준비를 차근차근 밟아오다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성장기 그가 받은 태자로서의 교육은 당의 제도를 기반으로 하여, 유학적 지식과 통치 역량을 키우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흐름은 독특할 것이 없는 것이지만,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이러한 기반 속에 경문왕이 즉위 이후 야심차게 시도한 유학 중심의 통치 질서 확립과 정국 운영은 아들인 헌강왕대에 꽃을 피우게 된다. 즉위 초반부터 본격화된 그의 유학진흥 정책은 자신이 태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교육받은 내용들을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국학에 거둥하고, 중국 제왕들의 행동 규범을 따라 행동하였으며, 문한적 능력도 상당하여 신하들과 詩作을 하거나 선사의 비명을 직접 찬술하였다. 이는 전대의 국왕들과는 구별되는 모습으로, 헌강왕이 유학적 질서를 정치 영역에 제한적으로 도입하여 왕권 강화 수단으로만 삼고자 했던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헌강왕 재위 후반부에 이러한 정책은 더욱 강화된다. 이 시기에는 일단의 문한 기구가 정비되는데, 그 주축은 翰林臺와 瑞書院그리고 崇文院이었다. 국왕의 깊은 관심 속에 유학적 소양을 갖춘 관료들이 국학을 통해 성장하였고, 당으로 건너가 유학하거나, 賓貢科에 합격하여 당에서의 관료 경험을 가진 문한관들이 요직에 진출했다. 이 시기 헌강왕의 유학 진흥 정책은 사회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학적 질서에 기반한 신라 사회의 질적인 변화는 이 시기의 짧은 실험으로 완성되기는 어려운 목표였다. 헌강왕의 짧은 치세를 이어 경문왕가를 이끌어 가야 했던 인물은 정강왕과 진성왕이었다. 이들은 헌강왕과는 달리 왕재로서의 교육은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시기에 경문왕가의 유학 진흥 정책은 한계에 봉착한다. 정강왕대에는 국왕이 직접 참여하는 백고좌와 강경 행사가 다시 시행되었고, 이는 진성왕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연이은 불사에 대한 기록에 대비될만한 유학 진흥과 관련된 정책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와 더불어 헌강왕과 함께 당시의 정국을 주도한 시중 金敏恭등이 물러나면서 정국을 주도한 세력도 교체된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정강왕의 짧은 치세와 진성왕의 즉위였다. 여성 왕의 존재는 신라의 내적 전통에 힘입은 경문왕가 내부의 왕위 계승이라는 명분에는 기여했을 수 있지만, 유학적 정통론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결과 유학적 질서에 기반했던 경문왕가 중심의 중앙 정치 재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진골 귀족의 정치적 합의에 따른 통치와 정치적 혼란이 이어져 결국 후삼국의 분열을 불러오게 된다.
이러한 기반 속에 경문왕이 즉위 이후 야심차게 시도한 유학 중심의 통치 질서 확립과 정국 운영은 아들인 헌강왕대에 꽃을 피우게 된다. 즉위 초반부터 본격화된 그의 유학진흥 정책은 자신이 태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교육받은 내용들을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국학에 거둥하고, 중국 제왕들의 행동 규범을 따라 행동하였으며, 문한적 능력도 상당하여 신하들과 詩作을 하거나 선사의 비명을 직접 찬술하였다. 이는 전대의 국왕들과는 구별되는 모습으로, 헌강왕이 유학적 질서를 정치 영역에 제한적으로 도입하여 왕권 강화 수단으로만 삼고자 했던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헌강왕 재위 후반부에 이러한 정책은 더욱 강화된다. 이 시기에는 일단의 문한 기구가 정비되는데, 그 주축은 翰林臺와 瑞書院그리고 崇文院이었다. 국왕의 깊은 관심 속에 유학적 소양을 갖춘 관료들이 국학을 통해 성장하였고, 당으로 건너가 유학하거나, 賓貢科에 합격하여 당에서의 관료 경험을 가진 문한관들이 요직에 진출했다. 이 시기 헌강왕의 유학 진흥 정책은 사회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학적 질서에 기반한 신라 사회의 질적인 변화는 이 시기의 짧은 실험으로 완성되기는 어려운 목표였다. 헌강왕의 짧은 치세를 이어 경문왕가를 이끌어 가야 했던 인물은 정강왕과 진성왕이었다. 이들은 헌강왕과는 달리 왕재로서의 교육은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시기에 경문왕가의 유학 진흥 정책은 한계에 봉착한다. 정강왕대에는 국왕이 직접 참여하는 백고좌와 강경 행사가 다시 시행되었고, 이는 진성왕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연이은 불사에 대한 기록에 대비될만한 유학 진흥과 관련된 정책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와 더불어 헌강왕과 함께 당시의 정국을 주도한 시중 金敏恭등이 물러나면서 정국을 주도한 세력도 교체된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정강왕의 짧은 치세와 진성왕의 즉위였다. 여성 왕의 존재는 신라의 내적 전통에 힘입은 경문왕가 내부의 왕위 계승이라는 명분에는 기여했을 수 있지만, 유학적 정통론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결과 유학적 질서에 기반했던 경문왕가 중심의 중앙 정치 재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고, 진골 귀족의 정치적 합의에 따른 통치와 정치적 혼란이 이어져 결국 후삼국의 분열을 불러오게 된다.
본문·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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