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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23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237 - 271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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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가 취한 ‘海防’ 정책은 단순히 군사적 전략을 떠나 중국이 당시 세계를 인식하던 시각과 기준을 보여 준다. 뛰어난 기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낙후되어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하게 된 데에는 외부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경영을 전개하고자 하는 국가 차원의 전략이 부재하였음이 큰 원인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해상으로부터의 대규모 침략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거나 변방의 위협이 늘 북방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海防의 수준을 저하시키고 陸防(塞防)중심의 군사전략 체계로 나아가게 해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宋ㆍ元 시기를 거쳐 명초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을 보유하였던 중국이 아편전쟁 발발 당시 여전히 중세시기 수준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과 함께 제1차 아편전쟁을 거치고 난 이후에도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별다른 자각 없이 天朝 체제를 유지하려 한 것은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대외 인식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양무운동이 고양되던 시기에 이르러서도 운동의 목적이 청조 지배층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려 한 데서 드러나는 양무 사업의 중첩성과 혼란은, 北洋水師의 해군기지를 선정할 때의 주요 기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폐쇄적이고 근시안적인 양무운동의 성격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제1차 아편전쟁 이후 海防 정책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살펴보고 이어서 양무운동 시기 이홍장에 의해 주도된 海防 건설이 北洋水師의 건립과 더불어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더불어 동아시아에 해군기지와 함께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한 독일이 어떠한 해양 정책을 통해 중국에 접근하게 되며 교주만 식민지화의 과정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탐색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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