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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일본공간 일본공간 제26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51 - 8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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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박중양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의 친일관료로서의 의식과 행동을 밝혔다. 박중양은 일본유학, 러일전쟁 종군을 통해서 일본의 신뢰를 획득해 관료로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1904년 귀국하여 1906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대구 군수로 발탁되었다가 1907년부터 3년 3개월 동안 관찰사로 재직했다. 대한제국 시절 박중양은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革舊改新을 구호로 일본의 제도와 시설을 도입하는 데 앞장서는 한편, 재한일본인의 이해를 대변하고 의병탄압에 협력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했다. 3.1운동 때에는 경북관찰사 시절의 의병 선유 활동 경험을 살려 대구에서 자제단을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일본에 대한 철저한 충성심으로 관료로서 고속 승진할 수 있었고 여성문제로 두차례 낙마한 후에도 다시 관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박중양은 한국병합 이후 총독부의 시정방침과 산업정책에 따라 도작 개량, 뽕나무 보급, 도로 개수 등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사업들을 강제적으로 시행해 조선인의 많은 반발을 샀지만 ‘민도’가 낮은 조선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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