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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동아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한국근현대미술사학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41집
발행연도
수록면
37 - 60 (24page)
DOI
10.46834/jkmcah.2021.07.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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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키워드

1872년 ‘미술’이 서구의 번역어로 등장한 이래, 서예는 교양과 수기라는 종래의 존재 기반을 잃어버리고 미술과 비미술의 경계를 부유했다. 이미 일본 내에서는 고야마 쇼타로(小山正太郞)의 유명한 ‘서는 미술 아니다’(1882년) 논쟁 이후, 1900년대 초 식산흥업의 정책 아래 미술의 외연에서 배제되었던 서예가 다시 ‘미술’로 전시된 것은 1922년 조선미전에서였다. 미술의 공적 무대에서 사라진 서예가 조선미전에 재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종래 조선 서화가들의 건의에 따라 서예가 최종 채택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총독부 입장에서도 조선미전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그들의 존재 기반이었던 서부의 설치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던 조선미전의 개설 목적을 고려하면 총독부가 단순히 조선 서화가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의견에 따라 서부를 설치했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총독부가 서부 개설을 감행한 배경에는 조선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회유하는 것 이외에 서예가 내선융화를 근간으로 한 식민지 정책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는 당시 총독부가 한문을 동종동문론(同種同文論)의 근간으로 인식하고 식민지 정책에 적극 활용하고 있었던 점, 서부 출품작품 가운데 메이지천황어제(明治天皇御題),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비롯해 효행, 충성 등 천황제 이데올로기에서 강조했던 유교적 덕목이 다수 확인되는 점, 일본어인 가나(仮名) 서예의 확대 등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이에 본 소론에서는 종래 다각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는 조선미전 서부 개설의 동인을 정치적 맥락에서 재고하고, 이후 공예부 개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사회교화의 일조(一助)”를 축으로 한 식민정책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서부 개설에서 폐지, 그리고 1932년 공예부의 설치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살펴보고, 특히 서부 폐지와 공예부 개설이 1930년대 초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의 새로운 통치 방침을 반영한 결과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기존에 언급되었던 ‘문화정책의 일환’이라는 일반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조선미전의 정치성을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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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Ⅰ. 머리말
  2. Ⅱ. 서부 개설 배경
  3. Ⅲ. 서부 출품작 경향
  4. Ⅳ. 서부 폐지와 공예부의 신설
  5. Ⅴ. 맺음말
  6. 참고문헌
  7. 국문초록
  8. Abstract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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