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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채준형 (인천대학교)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史叢(사총) 제101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41 - 94 (5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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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운동과 위안스카이 정부에 의한 유교적 상징과 의식의 부활은 오랫동안 시대착오적인 사건으로 위안스카이 정부의 퇴행적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이해되어 왔다. 반만(反滿) 슬로건이 1911년 혁명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화정 성립 직후 중국 사회는 명확하고 잘 정의된 가치를 결여한 지성사적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유교적 가치는 붕괴되고 민족주의적 가치는 모호한, 여러 대안적인 담론이 경쟁하는 시기였다. 대부분의 중국 엘리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 목표 중 하나는 강력한 민족 국가를 구축하고 국부를 늘려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민족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 정부에 기반한 정치적 안정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공교운동은 이러한 중국 엘리트들의 지적 고뇌의 산물이었다. 금문학파의 경전해석 전통을 계승한 공교운동의 지지자들은 유교적 가치를 국가기구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 대중이 종교의 힘으로 유교 가치를 내면화하도록 함으로써 민족적-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려 하였다. 이는 공교운동의 주창자들이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와 서구 자본주의 사이에 일정한 양립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의 내면화는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는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한 ‘바람직한’ 중국 시민을 주조해내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교운동에 대한 위안스카이 정부의 태도는 상당히 양가적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종종 반동적이고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가진 부패한 정치인으로 묘사된다.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다소 불공평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가 혜안을 가진 뛰어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흐름은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지식인들은 분명히 정체성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국과 서구와의 관계, 현재와 과거 사이의 연속과 단절, 생존에 필요한 편협한 민족주의와 보편 제국의 기억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등의 문제는 중국 엘리트들에게 커다란 과제로 남겨져 있었다. “서구적” 가치의 맹렬한 공격에 맞서 유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중국 문화와 중국적 가치의 정서적 원천으로 여겨지는 것 뿐이었다. 공교운동에서는 중국 사회에서 유교, 또는 유교적 가치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단선적으로 진화하는 “서구적” 모델을 따라 근대화를 추구하는 것에 동참하는 것 뿐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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