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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은미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퇴계학연구원 퇴계학보 퇴계학보 제148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31 - 26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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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2500여 수에 이르는데, 다산의 賦는 단 2편만 전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석지부」를 대상으로, 다산의 부 창작 이유와, 寡作의 배경, 그리고 유배기와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부가 우리 문학사에 들어온 것은 남북국 시대의 일이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科賦로 정착하게 되고 형식주의로 치우치게 된다. 과거를 준비하는 잠재적 관료들의 부 습작 열기는 뜨거웠지만, 더 이상 부는 문학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 후기 문인들의 문집에 부가 실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산의 부가 2편만 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산이 과거를 준비한 18세기 후반도 이미 부가 과부로 정착한 후였다. 다산 역시 과시를 준비하며 부 창작을 연습했지만 부를 향유한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던 다산이 1801년 長鬐 유배기에 새삼스럽게 부를 지은 것이다. 유배지의 다산은 스스로 죄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고, 자신을 당쟁의 희생자로 인식하였다. 장기에서 쓴 글에서는 신유박해가 천주교와 유교의 사상적 대립이 아닌 당쟁의 결과라는 다산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異端과 異端邪說도 구분했는데, 다산에 따르면 천주교는 이단이지 이단사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산은 천주교 때문에 유배객이 된 것이다. 유배지의 다산은 부의 기원을 생각했다. 失志한 선비들의 문학 양식이던 부와, 정치적 불우함을 드러내던 楚辭를 떠올렸다. 다산은 이미 1790년 海美 유배 무렵의 시에서도 정치적 곤경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초사의 영향을 보여준 바가 있다. 자신은 죄가 없는데도 당쟁의 결과 유배객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다산은 유배지 장기에서 초사와 부를 소환했고, 辭와 賦의 양식을 통해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었다.「석지부」에서 다산은 公冶長과 張橫渠를 거론하여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말하였고, 韓愈와 蘇軾을 언급하여 자신의 현재적 곤경을 넘어서는 미래적 전망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운명에 순응하는 체념적 정서가 아니다. 오히려 깊은 뿌리와 무성한 가지를 이루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죄가 없으므로 떳떳한 다산은 자신이 천명을 받들고 있어 불만스럽지 않다고 말한다. 이전의 문인들이 사와 부를 지었던 실지의 상황처럼, 지금 다산이 처한 상황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외부 문제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도 ‘惜志’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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