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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해방 후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던 홍명희가 1948년에 월북을 단행하게 된 상황에 주목하며, 사상적 지향과 체제 사이에서 모순과 방황을 체험한 해방기 지식인의 자기서사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식민지 시기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던 홍명희는 1939년에 『임꺽정』 연재를 중단하고 경기도 양주군으로 이주해서 은둔했다. 친일 협력의 과오를 남기지 않았던 지식인이자 존경 받는 원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던 홍명희는 해방 후에도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했지만, 1947년 10월에 민주통 일당의 당수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미국과 소련을 모두 불신하며 해방기 중도적인 민족주의자로서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했던 홍명희는 자기 자신을 반공주의자로 규정했다. 통일이냐 분열이냐를 외치며 민족의 미래가 통일과 독립에 있음을 거듭 강조했던 홍명희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지지 평양 시민대회 참관을 위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갔다. 같은 행사에 참가했던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온 것과는 달리 홍명희는 평양에 남았을 뿐만 아니라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1948년 초 서울에서 자신은 절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던 홍명희의 정치적 전향은 역설적이게도 자기서사의 은폐와 모순의 측면을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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