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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은일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72호
발행연도
2018.11
수록면
109 - 147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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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순천도호부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던 목장은 백야곶 목장으로 1432년(세종 14) 이후에서 1434년 사이에 설치되었다. 이 목장 설치를 필두로 1454년(단종 2) 이전 즈음에 제리도·송도목장이 증설되었다. 이후 1481년(성종 12) 이전 어느 시기 즈음에 돌산도·묘도목장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순천부목장 중 임진왜란 시기에서 1618년(광해 10) 사이에 제리도·묘도목장의 경우 일시적으로 폐지되었고, 송도목장의 경우 완전 폐지되었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목장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면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러했었던 순천부의 목장은 1678년(숙종 4)에 재정비되었는데, 이 때 목장 수는 23곳으로 전국 고을단위 중에서 가장 많았다. 이후 순천부의 목장은 축소 또는 폐지되는 과정을 밟게 되다가 1895년(고종 32)에 모두 폐지되었다. 순천부의 목장 위치는 그 소재지를 알 수 없는 사질도목장 그리고 낙안군 소속에서 순천부로 편입되었던 장도목장, 행정구역의 변동으로 흥양현(현 고흥군)에서 순천부로 편입되었던 내라노도·외라노도목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 여수시 일원에 위치에 있었다. 순천부의 목장은 곶과 섬에 위치에 있어 울타리가 없어도 방목하기 용이했고, 입지 조건은 대부분 구릉지와 평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물이 풍부하고 겨울에도 그다지 춥지 않아 목양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목장의 실태를 보면 우선 큰 목장은 둘레가 130리 정도, 작은 목장은 둘레가 10리 정도 였고, 마필 수는 많은 곳은 1,000여 마리, 작은 곳이 8~9마리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각 목장에는 다수의 公?가 있었으며 그 외 마신당, 假家, 저수지 등이 있었고 일부 목장에는 목장성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순천부의 목장에는 여러 목장조직이 있었다. 우선 목장을 관할하여 말의 번식?개량?관리?조달 등의 일을 책임 감독하는 자는 감목관이었다. 감목관 하부조직으로 우선 목양에 직접 종사하는 직책으로 群頭?群副?牧子 등이 있었다. 다음으로 행정업무 등을 담당하는 監官?砲手?人吏?牧吏?通引?及唱?房子?知印?使令?津夫·軍官?封進馬?養軍?納番牧?牧募軍?理馬 등도 있었다. 순천부의 목장 자금운영은 크게 수세와 지출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수세는 토지와 환곡 등이며, 지출은 奉上·선물상납·녹봉·관청유지비·출장비·사료비·운반비 등 다양하였다. 이렇게 운영되었던 순천부의 목장은 수세보다 지출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따라 순천부의 목장에서는 백성들에게 다양한 목록의 조세를 과다하게 징수하였을 것으로 보였다. 순천부의 목장은 임진왜란 때 국란극복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순천부의 목장은 평상시에 조선정부의 마정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었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이를 극복하는데 적극 앞장섰던 곳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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