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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길식 (용인대학교)
저널정보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백제문화 제57호
발행연도
2017.8
수록면
81 - 117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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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동유적과 월평산성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관방시설로서 4세기 중후엽~9세기까지 이 지역의 역사 변천과 궤를 같이하여 점유세력이 변화하였다. 먼저 4세기 중후엽∼5세기 후반에 저장창고군이 집중 조성되고 토성과 목책?환호 등 관방시설을 갖춘 한성백제의 물류집산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취락에서는 한성백제양식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는 등 한성백제 중앙과 연결된 거점취락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 후 5세기 후반(475년 이후)에 이르러 고구려가 점거하여 한성백제기에 축조되어 있던 기존 관방시설을 재활용하면서 새로 석축성벽①을 보축하여 多重의 관방시설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점유되지는 못하였으며, 주둔 인원 또한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6세기 중후엽에 이르면 다시 백제에 의해 월평산성과 석축성벽②가 축성되어 하나의 성체로 기능하였다. 월평산성은 6세기 중후엽의 백제 사비기의 축성기법을 보이면서 6세기 중후엽~7세기 전반의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목곽고와 저장혈 등 많은 유구들이 이때 조성되는 등 최성기를 이루었다. 백제가 이곳을 다시 점유하고 대규모 관방시설을 축조한 것은 신라를 방비함과 동시에 한성백제 때부터 기능하여 왔던 물류기지의 역할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따라서 사비기에도 물류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는 관인이 파견되어 지방지배가 이루어졌으며, 이들에 의해 문서행정과 격조를 갖춘 제향도 거행되었다. 7세기 중엽에 이르면 신라후기양식 토기와 철제 농공구?무기류가 다수 확인되는 등 신라 세력이 점거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전체 관방시설 중 월평산성만 점거하고, 최소한의 인력만 주둔하고 있었으나 관인 파견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이후 8세기 후반~9세기에 들어서 토기와 기와 철제과대와 무기?농기구 등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어 나말여초의 사회적 혼란기에 지방호족세력의 근거지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추찰되었다. 이와 같이 월평동유적과 월평산성은 4세기 중후엽∼7세기 중후엽까지는 백제?고구려?신라의 각축장으로, 나말여초기에는 지방호족세력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등 삼국간의 관계는 물론, 지방사회의 역동적인 역사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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