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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건 (경기도자박물관)
저널정보
동양미술사학회 동양미술사학 동양미술사학 제3권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89 - 132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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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자의 역사에서 고려시대 청자의 대표를 梅甁이라 한다면 조선시대 백자는 龍樽이라 할 수 있다. 청화로 그린 용준은 조선의 개국이후 체제가 정비되고 儀禮와 관련 器皿制式이 정립되는 첫 단계부터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기본 골격을 준수하면서 시종일관 하였다. 따라서 청화용준을 조선백자의 상징이며 중심적 존재라고 하는 데 이의는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에 연구 경향은 17세기에 청화재료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假畵와 鐵畵 재료인 石間?를 썼고 또 그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 되었다는 전제 아래 ‘철화백자의 시대’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결국 이러한입장을 취함으로서 조선백자의 근간으로 조형의 중심을 이끌며 일정한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청화용준이 일백년 가까이 단절되었고 다시 18세기에 새롭게 구성한 조형체계로 재등장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러한 인식은 조선 중, 후기 백자의 전개에서 조형정신의 계승은 물론 조선사회를 구성하는 지적 엘리트들의 일정한 美意識을 규명하는데 심각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임진란 이후 광해군11년(1619)에 와서 어렵게 청화를 구하여용준 제작이 가능해졌고 이후 왕실의 雙龍樽 제작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존하는 조선중기, 후기청화백자 쌍용준의 조형적 특징을 기준으로 여섯 유형으로 나누고 각각의 성격을 분석했으며, 여기서 分院窯址 出土 철화용준의 절대편년 자료를 대입하여 분류 기준의 당위성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철화백자는 사용주체도 달랐고 명분도 분명히 달랐다. 철화는 청화와 함께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동일한 시공간에서 각각 다른 조형의장을 계승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공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적인 계급사회의 정착을 추구했던 조선의 司饔院 分院에서 정통성을 갖는 청화백자와는 전혀 다른 위치와 기능으로 17세기 동안 독자적 철화백자의 조형체계를 확립했고 곧 이어 간소화 쇠퇴하면서 지방 民窯로이전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선시대 백자의 대표격인 용준의 조형체계를 밝히는 일은 조선백자의 근간을 밝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조선 전기에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樽은 17세기 전기를 지나면서 한가지로 통합 되는데 그 과정에서 청화백자 쌍용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제작 주체였던 사대부들의 관심이 제왕의 쌍용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士大夫들은 이 용준에 용 그림 대신 四君子와 花鳥, 山水, 人物, 魚 蟹, 十長生 등 새로운 그림들을 敎化와 祈福의 기능을 존중하면서 그려넣었다. 따라서 용 그림 주변에서 莊嚴을 상징했던 당초, 여의두, 劍形 蓮瓣 같은 종속문양대를 생략하거나 단순화하는 것이 신하로서 사대부가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선후기 上品 畵樽 가운데검형연판문대를 갖춘 예가 박병래선생 기증품 <白磁靑畵山水文樽>(높이 38.1) 한 점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제작 분위기를 설명해 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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