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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일환 (순천향대학교)
저널정보
순천향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31권 제2호
발행연도
2012.6
수록면
92 - 139 (4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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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조 세종 1년(1419)에 단행한 대마도정벌을 전쟁사적 시각에서 연구한 것이다. 이 전쟁은 고려 말부터 자주 우리 해안을 침탈하던 倭寇를 근절하기 위한 군사적 토벌이었다.이 전쟁은 세종 원년(1419) 대마도 왜인들이 식량을 약탈할 목적으로 중국의 요동지역을 공격하러 가는 가운데 충청도 비인의 도두음곶을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습적인 왜구의 침탈로 인한 엄청난 인명피해에 놀란 조선정부는 군사적 보복을 위해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이 전쟁은 두 가지로 작전계획을 짰는데, 첫째는 왜구의 주력부대가 중국으로 떠난 상황에서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급습하여 이들의 가족을 포로로 잡는다는 것과, 둘째는 왜구들의 귀환을 기다려 해상에서 요격한 후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마도 정벌은 시간적으로 급박하게 진행되었다.이종무를 최고지휘관으로 한 1만7천여명의 조선군이 대마도의 아소만으로 진입하여 요충지인 두지포에 상륙하자 놀란 대마도주와 왜인들은 산속으로 도망을 하였고 원정군은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 사이 원정군은 대마도의 육상통로의 요충지인 훈내곶을 장악한 후 목책을 치고 대마도를 양분한 후, 수색을 통해 왜인의 잔당을 토벌하였다. 그 가운데 上縣지역의 니로군에 왜인들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이들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하여 매복하고 있던 왜인들의 기습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두지포로 철수하였다.두지포에 돌아온 이종무 원정군은 7월 3일 결국 귀환을 결정한다.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귀환한 것은 요동으로 북상한 왜구 주력부대가 귀환할 시기가 되어 이들을 조선 연안에서 요격해야할 2차 작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東征을 준비 중에 극적인 상황전환이 일어난다. 왜구의 요동 侵寇에 대한 정보를 전해 받은 중국정부가 복병을 이용해 금주 망해과에서 왜구를 궤멸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를 접한 조선정부는 2차 동정을 중단하고 외교적 압박으로 대마도주를 굴복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과 중국 명나라의 共助에 의해 대마도 왜구를 궤멸시키고 대마도를 조선에 복속시키는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토벌전쟁의 결과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의 요동, 산둥 반도에 대한 왜구출몰이 종식되었다.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간에 입장을 달리 하지만, 이후 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 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조선을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이와 동시에 대마도가 조선의 요구에 순응해 옴에 따라 각종 통교제한 정책의 실시가 가능해졌고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포가 왜인들의 교역항구로 정립되었고 왜관을 설치하고 흥리선이 도박하여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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