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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상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11호
발행연도
2023.9
수록면
331 - 362 (32page)
DOI
10.37331/JKAH.2023.9.11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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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4세기 동진에 조공한 이래 왕실의 부여출자설을 끊임없이 주장해왔다. 왕실의 출자를 주장한다는 것은 왕실 혈통의 신성성을 강조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목적이 있기에 출자의 대상으로 지목된 존재는 당대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백제는 중원왕조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왕실의 출자를 주장하였기에 부여는 중원왕조에게서도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백제 왕실의 출자 대상으로 지목된 부여가 백제에게 어떤 국제적, 국내적 가치가 있었는지 밝혀냄으로서 백제 왕실의 부여출자설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의를 고찰하는 것이다.
부여는 전한대까지는 명확한 외교관계가 보이지 않으며 경계해야 할 이민족 중 하나였다. 하지만 후한대에 이르자 외교관계를 확립하고 심지어 순제 때는 부여왕이 직접 입조하여 군신의례를 행하게 된다. 이후 부여는 『삼국지』와 같은 역사서에 긍정적으로 묘사되게 된다. 이는 부여가 중원왕조에게 ‘동이의 번국’을 표상하는 역사적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원왕조의 부여인식은 백제가 왕실 출자의 대상으로 부여를 지목한 하나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백제가 부여출자설을 주장한 것은 중원왕조로부터 책봉을 받는다고 하는 문제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백제에게 중원왕조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백제의 전신인 삼한제국에서는 중국의 군현인 낙랑군, 대방군으로부터 인수, 의책을 사여받는 것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있었다.
하지만 313년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 대방군이 붕괴함에 따라 변군과의 교섭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에 변군과의 교섭과 달리 당대의 중원왕조였던 동진과 직접 교섭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역의 군장 정도로는 부족했기에 백제는 외교전술의 일환으로서 부여출자를 주장했을 것이다. 즉, 백제 국내의 지배층은 동진의 책봉을 받은 왕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백제 왕실은 높아진 권위를 바탕으로 삼한지역에서 자신을 우위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목차

국문 초록
I. 머리말
II. 동아시아 세계에서 부여가 가지는 역사적 지위
III. 백제부여출자설의 국제적 계기와 국내적 계기
I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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