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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명지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9호
발행연도
수록면
243 - 273 (31page)
DOI
10.65509/JSHS.2023.12.59.243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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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키워드

나당동맹은 649년에 김춘추와 당 태종이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서 성립하였기 때문에 668년 12월에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나당동맹은 668년 12월 이후에도 연장되었는데,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당이 백제고지와 고구려고지에 기미정책을 실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은 신라와 웅진도독부 사이에 회맹을 추진하여 664년에 웅령과 665년에 취리산에서 회맹을 맺었다. 당의 입장에서 취리산 회맹은 당이 주재한 계림주대도독과 웅진도독의 회맹이었다. 따라서 당은 계림대도독부와 웅진도독부의 기미정책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답설인귀서」는 ‘평양이남 백제토지’가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이다. ‘평양이남 백제토지’ 즉 ‘평양이남의 고구려 토지와 백제 토지’의 모든 권리는 신라에게 있었다. 그러나 당은 이것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 지역에 기미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신라와 갈등이 발생하였다. 결국 신라와 당의 관계는 나당전쟁이라는 새로운 상황으로 전환되었다. 나당동맹이 파탄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평양이남 백제토지’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다. 결국 나당동맹의 성립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평양이남 백제 토지’는 나당동맹의 파탄에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평양이남 백제토지’의 영유 문제가 신라와 당 사이에 발생하였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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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국문초록
  2. Ⅰ. 머리말
  3. Ⅱ. 나당동맹의 종료와 연장
  4. Ⅲ. 나당동맹의 파탄과 의미
  5. Ⅳ. 맺음말
  6. 참고문헌
  7. ABSTRACT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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