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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저널정보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한국학연구 제26호
발행연도
수록면
337 - 387 (5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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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키워드

이범진은 일본의 강제적인 한국병합 5개월 후인 1911년 1월 26일 제정러시아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자결순국하였다. 그는 러시아짜르니콜라이2세, 고종황제, 그리고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장남 이기종 앞으로유서를 남겼다. 나라의 멸망과 고종의 권력 상실에도 원수인 일본을 물리칠 수 없고 국권회복의 방책도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으니양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이범진은 자결 3개월 전인 1910년 10월경 러시아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김현토와 미주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사로 유서와 같은 맥락의 심경을 밝히는 편지와 함께 갖고 있던 재산을 나누어 보냈다. 이범진은 자신의 기부금의 수신자로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에는 청년회와 한민학교 두 기관과 개인 6명(이범윤, 이상설, 유인석, 김현토, 안중근 의사 부인, 민긍호 의병장 부인)에게, 그리고 미주 한인사회에는 신한민보사와 대동보국회, 한인소학교 등 기관과 단체를 구체적으로 거명하였다.이범진이 명시한 기부금의 수신처를 비교해보면, 우선 그가 청소년교육과 언론활동에 큰 기대를 걸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신한민보사에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 1906년 이후 추구했던 외교활동과 급진적인 의병활동이 모두 실패로 귀결된 상황에서 청년교육과 언론활동 등의점진적인 활동에서 국권회복의 잠재적 가능성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러시아 연해주의 경우 특히 기부금의 수신자로 거명된 인물들은 헤이그밀사사건, 동의회 의병활동, 13도의군, 성명회 등 이범진이 러일전쟁이후 항일구국운동에서 자신이 지원하고 협력했으며 국권회복의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항일운동의 동지들이거나, 안중근 부인이나 민긍호 의병장 부인처럼당시 연해주에 머물고 있었으나 생활고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항일투사들의 가족들이었다.이 논문에서는 이범진의 자결과 기부금 송금과 관련하여 1910년 일본의강제적인 한국병합에서 자결에 이르기까지의 5개월간의 기간에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이범진과 가장 가깝게 지내며 기맥을 통하고 있던 이갑의역할에 주목하였다. 이갑은 1910년대 3월 이후 고종황제를 수차례 접견하고 러시아황제 니콜라이2세에게 전달하는 밀서의 전달을 책임진 밀사로선임되어 러시아에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이갑이 국내를 탈출한 이후 칭다오, 상하이를 거쳐 연해주의 얀치허(연추), 블라디보스토크을 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행적을 밝혔다.이범진과 이갑의 만남은 1910년 11월경으로 추정되며, 이범진은 이갑을통하여 고종과 러시아지역 항일세력들의 동향, 특히 한인사회내의 지방파쟁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특히 이범진은 청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갑의 계획에 공감하게 되었다. 또한 주미공사로서 미주의 한인사회에 인연을 갖고 있던 이범진은 안창호 등 공립협회-국민회-대한인국민회의 주요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갑을 통하여 미주 한인사회, 특히 신한민보의 언론활동과 학생양성소 설립 등의 청년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배경으로 하여 기울어가고 있던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외교적, 군사적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이범진이 ‘한일병합’으로 인한 절망적 상황에서 새로운 국권회복방안으로 점진적인 교육?언론활동에 희망을 걸게 된 것이다.러시아지역은 1906년 이후 일본통치하의 대한제국 정부의 주러공사직을 박탈당하여 사실상 망명생활에 들어간 이범진이 국권회복운동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곳이다. 러일전쟁이후 연해주에서 전개되었던 항일구국운동이 일본의 강제적 한국병합으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이범진은 국권회복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한인사회에서 전개된 동족상잔의 지방파쟁은 이범진이 더 이상 연해주 지역에서의 구국운동에 대한희망을 접게 만들었다.미주한인사회에서 이범진은 헤이그평화회의 파견대표단의 주역으로,그리고 고종황제의 외교대권수행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자결순국이전 미주 한인사회의 이범진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것은 아관파천의 주역으로 국권을 외세인 러시아에 위탁한 점, 주미공사시절 유학생 등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불미스러운 일화을남긴 점, 합병직전에 권위주의적이며 특권적 행태를 보이고 있던 의병장이범윤과의 긴밀한 관계 등이 그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근거들이었다. 그배경에는 공화주의적 정치이념을 선호하였던 국민회와 신한민보 등 미주한인사회의 지배적인 정치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종황제의 충신으로 군주론자였던 이범진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가 없었다.그러나 자결순국이후 이범진에 대한 미주 한인사회의 평가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주도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긍정적으로 바뀌게된다. 이후 이범진은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 순국선열로서 소개되었으며,청국과 일본에 대하여 남다른 독립정신을 소유했던 인물로 재평가되었다.이 논문에서는 그동안 학계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순국 전후 이범진이 미국의 신한민보사에 보낸 이범진의 사진, 서신과 시(詩) 등을 게재한 『신한민보』 등의 보도기사 등을 새로이 소개하였고, 이를 통해 사후에 이범진이 1945년까지 미주한인사회에서 어떻게 기념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이범진의 자결 순국은 항일구국운동의 한 시기가 종결됨을 의미한다.1904~1905년의 러일전쟁 이후 이범진이 국내의 고종황제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추진했던 외교적 활동과 무장투쟁 방식의 구국운동은 러시아의 지원과 원조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과 사실상의 동맹관계로들어가게 되고 ‘한일합병’이 체결되면서 이들 항일운동이 좌절되었고, 이범진은 새로운 항일방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범진은 장기적인 전망하에서 청년을 교육양성하는 방안에 희망을 걸었다. 그동안 추진했던 일련의 구국활동이 모두 좌절된 상황에서 이범진은 자결을 결심함과 동시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러시아연해주와 미주의 한인사회에 기부하였다. 청년양성과 언론활동에 대한 이범진의 희망과 기대가 담겨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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