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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광규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저널정보
역사학연구소 역사연구 역사연구 제49호
발행연도
2024.1
수록면
13 - 48 (36page)
DOI
10.31552/jh.2024.01.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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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교육가이자 교육학자로 유명한 오천석의 생애에서, 오천석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부터 8·15 해방 이전까지의 시기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가 자서전에서 간략하게만 언급했거나 전혀 말하지 않은 부분을 밝힌 것이다. 오천석은 1932년 1월 귀국하여 동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35년 9월 사직했다. 보성전문학교에 전공인 교육학 과목이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과 연구에 대한 아쉬움, 미국 박사를 우대하지 않는 학교 분위기와 운영에 대한 불만 등으로 오천석의 보성전문학교 교수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성전문학교를 사직한 뒤 오천석은 회사 임원으로 살아갔다. 처음에는 평양의 대표적인 유지로서 사업가이자 개신교 장로인 김동원이 설립한 태안양행에서 중역으로 일했다. 이후 다시 서울로 이주하여 평안도 출신 실업가 박흥식의 화신무역에서 영업과장으로 재직했다. 화신무역에 재직 중이던 1940년 12월-1941년 4월, 화신무역의 동남아 ‘진출’을 위해 남양 출장을 다녀왔으며, 『조광』 1941년 2-7월호에 「남양행」이라는 제목으로 기행문을 기고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942년 봄, 가족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했다. 상하이에서도 임승업의 경화산업과 기타 조선인, 중국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일했다. 태안양행, 화신무역, 경화산업은 모두 일제의 전쟁을 자본 축적의 기회로 적극 활용했던 회사였으며, 설립자들 모두 일제 말 전쟁 협력행위를 했다. 오천석이 보성전문학교 사직 이후부터 상하이 이주 전까지의 생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인 것은 아닐까. 오천석에게 태안양행, 화신무역, 경화산업 등에서 중역으로 활동했던 것과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건설’ 시도에 발맞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남양 출장은 자신의 삶에서 지우고 싶은 시간이자 경험이 아니었을까.

목차

국문초록
머리말 - 오천석의 사라진 시간, 지워진 경험
Ⅰ. ‘미국 박사’의 조선 전문학교 교수 생활
Ⅱ. ‘교육학자’의 식료품회사·무역회사 중역 생활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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