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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용윤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미술사연구회 미술사연구 미술사연구 제47호
발행연도
2024.12
수록면
7 - 36 (30page)
DOI
10.52799/JAH.2024.12.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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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서산진영과 사명진영을 역사적 맥락에서 원형을 추정해 보고 진영의 형식 전승, 변화, 확산을 승려 문중의 인식, 문중 간의 성쇠에 따른 경쟁과 공존이란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그리고 변화의 요소로 표충사 사액과 삼대사진영 등장에 주목하였다. 서산휴정과 사명유정이 입적하던 시기에 진영은 묘향산 보현사 내원암과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 모셔졌다. 두 진영 중 원형과 변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진영은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진영이다. 이 진영은 1671년 사건으로 진본은 사라졌지만, 기억을 통한 모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 중에 화승의 화풍이 반영되었지만, 의좌상에 가부좌한 자세, 양손으로 불자를 든 고유한 표현은 사명문중의 세거 사찰에 봉안된 <동화사 사명진영>(17세기 말), 삼대사진영 체재로 제작된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18세기), <보경사 사명진영>(18세기 후반)을 통해 전승되었다. 보경사는 <사명진영>을 스승인 <서산진영>과 보경 사 창건주 <원진국사진영>과 함께 제작해 역사와 사명문중의 법통을 세우는 동시에 사명 유정을 <보경사 삼장보살도>에 호법신으로 표현해 신격화하였다. 표충사는 초기에 사우를 짓고 사명진영을 모시고 춘추 제향하는 방식에서 시작하여 1738년에 태허남붕이 추진한 표충사 불사로 서산진영과 기허진영이 합향되면서 삼대사진영이 완성되었다. <표충사 사명진영>에는 1773년에 장황을 개조한 기록이 적혀 있으며, 화풍과 표현기법으로 보아 <사명진영>은 1773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충사 삼대사진영>은 사승 관계와 상관없이 <사명진영>을 중앙에 두고 <서산진영>은 측면에 두어 제자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사명진영>은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내려뜨리고 한 손은 불자를 쥐고 다른 손은 손잡이에 걸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는 <서산진영>과 <기허진영>에도 동 일하게 나타난다. <표충사 사명진영>에서 나타나는 이 고유한 표현은 편양파 출신인 월암 지한이 봉안한 <봉정사 사명진영>(1768)에서 확인되며, 이후 <용추사 사명진영>(1781), <통도사 사명진영>(19세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서산진영과 사명진영, 삼대사진영은 불교계와 사회의 변화에 반응하며 변화하였다. 그 변화의 방식은 때로는 문중의 정체성과 실리적 목적에 따른 전승이었으며 그 속에서는 진영을 조성 봉안한 주체들만이 공유했던 고유한 표현이 존재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서산·사명의 입적과 진영의 조성과 봉안
Ⅲ. 해인사 홍제암 사명진영의 전승과 변화
Ⅳ. 표충사 삼대사진영의 정립과 확산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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