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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노을 진 들녘』은 ‘근친상간’이라는 당대 대중소설의 선정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이러한 이야기의 배면으로 박경리가 지닌 생명의 능동성에 대한 단초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근대화와 보수화가 동시에 진행되었던 전후 사회에서 제도 바깥의 인물이자 야생의 생명력을 지닌 여성 주인공 주실은 세 명의 가부장으로부터 가해지는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전후의 국가 제도 내에 편입되지 못하고 타자화된 여성들의 도움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생명력을 회복한다. 대중소설로 인식되었던 노을 진 들녘은 여주인공에게 폭력으로 작용하는 폐쇄된 공간과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가부장 중심의 사회, 허무에 빠진 남성 주인공들의 혁명의 실패와 죽음, 전후 사회의 타자화된 마녀들의 공동체를 통한 여성 연대를 이야기의 골자로 하며 이러한 내용은 『노을 진 들녘』을 통속적 대중소설로써만 소비할 수 없게 하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생명력을 상징하는 주실이 타자화된 여성들과 연대하면서 끝까지 생존하게 된다는 결말은 이후까지 확장되어 나가는 박경리의 생명 사상의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와 같은 타자화된 여성들의 연대를 통한 생존 서사는 혁명을 기점으로 구세대의 몰락과 신세대의 출현을 제시하는 이전 세대의 여성작가나, 아프레걸의 허무와 일탈을 그린 이후의 여성작가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후를 관통하는 방식이다. 이는 특히 왜소해진 인간 실존의 죽음과 허무로 일관했던 동시기의 남성작가들과도 차별화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점은 전후 문학사 안에서 종종 단독자적 존재로 인식되었던 박경리만의 문학을 문학사의 지형 안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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