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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나영 (제주특별자치도)
저널정보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도서문화 도서문화 제64집
발행연도
2024.12
수록면
139 - 186 (4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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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도는 당시 조선 정부의 폐쇄적인 해양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해고도(四海孤島)의 육지와 격절(隔絶) · 고립(孤立)된 섬이라는 ‘닫힌 공간’으로 간주되어졌다. 하지만 이같은 조선 정부의 해로를 폐쇄한 육지로의 질서 설정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해역의 길목에 위치한 제주의 지리적 공간의 특수성은 자의적ㆍ타의적으로 한반도 주변 지역을 비롯한 동 · 서양여러 나라들과 다양한 접촉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렇듯 제주도는 조선 정부의 체제적 통제 장치와 상충되게 바다를 매개로 한 ‘열린 공간’으로서 자리하였다.
전근대 시기 당시 해금(海禁)과 공도(島政) 정책을 취하는 등 쇄국(鎖國)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근 조선과 달리, 동아시아 각국은 국제적인 무역항을 거점으로 한 광역의 교역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 즉, 중국의 복건(福建)과 광동(廣東), 일본의 규슈(九州) 일대를 비롯한 유구[琉球, 오키나와], 안남[安南, 베트남], 여송[呂宋, 필리핀], 서양의 불랑기국[佛朗機國, 포르투갈], 남번국[南藩國/紅毛國, 네덜란드] 등은 동아시아 해역을 서로 왕래하며 활발히 통교(通交)해 나갔다. 이때 동아시아 해상 교통로의 중앙에 위치한 제주도는 이들의 이정표(里程標)이자, 기항지(寄港地)로써 급수처(汲水處) 역할 수행했던 동시에 항해의 고정적 틀을 파괴시키는 위험 요소가 산재한 주요 표착 다발 지역으로, 해역을 오가는 많은 이국인(異國人)들이 빈번하게 제주도에 표도(漂到)되었다.
요컨대 당시 제주도에는 중국 · 일본 · 유구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와 교역하던 아란타국(阿蘭陀國)[네덜란드] 등의 서양인 및 여송(呂宋)[필리핀] 사람들도 표도해 왔음을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01년(순조 1) 여송인의 제주 표도를 둘러싼 이들의 송환처리 문제는 앞선 17세기 제주로 표도해 온 네덜란드인 박연과 하멜의 경우만큼이나 조선 당대의 큰 이슈이자 골칫거리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해당 사건은 또 다른 3건의 표류ㆍ표도 사건과 맞물리면서 다자간의 관계가 중층으로 얽혀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1801년 급수차 제주도 당포(唐浦)에 상륙한 여송인 5명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달아난 나머지 표도인들과 표류 전라도인 문순득이 1803년 12월 중국 광동(廣東)에서의 만남이 이뤄지는가 하면, 1807년 7월 제주도 우도(牛島)에 표류해 온 유구인[관리]과 당시 본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제주도에 체류되어 있던 여송인 3명과의 만남이 이뤄진다. 이때 유구인 궁평(宮平)이란 자는 1802년 유구국에 표류했던 문순득 등 6명과 중국인 서인실(徐三貫) 등 32명에 대해 중국으로의 호송을 책임 맡았던 자였다. 또한 1809년 6월, 3년 2개월간(1802.1.18.∼1805.1.8)의 유구 및 여송을 표류한 후 생환되어 온 우이도 홍어상인 문순득과 여송인 3명과의 만남 등이 있다.
이렇듯 ‘1801년 여송인의 제주 표도 사건’은 상기와 같이 조선-여송-유구-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의 다국적 표류 · 표도인들과의 관계망과 송환체계가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에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조선 측만이 아닌, 일본, 중국, 유구 측의 역대 동아시아 국가들 간 주고받은 외교문서를 모아놓은 사료집에도 기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다국적, 다자간의 중첩된 표인(漂人)들과의 만남 속에서 국적이 여송인임이 명확해진 제주 표도 이국인 3명[5명 중 2명 사망]은 여송인임이 조선정부에 인지되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정체 모를 이양선의 빈번한 출몰 등 공포와 두려움의 공간이자, 범접해서는 안될 통제 공간으로 인식돼 바닷길을 걸어 잠궜던 조선 정부의 좁은 세계관과 소극적 외교 정책 속에서 결국 송환되지 못한 채 제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주 바다[海域]는 동 · 서양의 국경 없는 교역(交易)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도(目睹)한 장본인이었다. 또한 의도하지 않았지만, 제주 표도 이국인(異國人)을 매개로 한 동아시아 대외정세 및 선진문물의 희귀한 정보와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서, 동아시아 해상 교류의 통교 요로(要路)로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왔음을 이 글을 통해 상기시켜 볼 수 있겠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1801년 여송인의 제주 표도
Ⅲ. 제주 표도 여송인의 청나라 압송(押送)과 회송(回送)
Ⅳ. 제주 표도 여송인 연계 동아시아 표류 양상
V.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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