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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이 글에서는 4세기 이전 신라 초기(斯盧國)의 國邑이 高墟村(沙梁部)과 楊山村(及梁部)으로 이루어진 二元的 구조였음을 살펴보았다. 건국시조 赫居世 이후 脫解尼師今까지 초기의 宮城이었던 金城은 高墟村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斯盧國을 구성하고 있던 6村 가운데 高墟村이 國邑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婆娑尼師今 22년(101) 月城이 새로 축조되고 王城으로 이용되면서, 國邑의 중심지는 月城이 위치한 楊山村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초기의 중심지였던 高墟村은 國邑의 제의적 중심지로 기능하며 계속 國邑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高墟村에는 赫居世와 관련된 始祖廟, 蘿井과 함께 赫居世의 妃인 閼英이 출현했던 閼英井 등 始祖 2聖을 기념하는 제사 유적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逸聖尼師今 5년(138) 金城에 政事堂이 설치되면서 阿達羅尼師今(재위 154~184년) 시기까지 다시 한동안 高墟村이 國邑의 중심지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伐休尼師今代에 月城의 宮殿을 수리하여 王宮으로 사용하면서부터 國邑의 중심지는 다시 楊山村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이 國邑의 중심지 金城과 月城을 오가게 되면서, 國邑의 범위는 자연스럽게 高墟村과 楊山村을 두 축으로 한 2部(沙梁部, 及梁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沾解尼師今 3년(249) 月城의 宮殿 남쪽에 南堂이 세워지면서 月城(梁部)은 더욱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을 강화하게 되었다. 한편 始祖廟, 蘿井, 閼英井 등 祭殿이 집중되어 있던 沙梁部는 더 이상 정치적 중심지로서는 기능하지 못했지만, 국가 祭儀의 중심지로서 國邑의 또 다른 기능인 제의적 기능을 지속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정치적 중심지와 제의적 중심지가 공존하는 현상은 고대 도시의 보편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신라 초기의 國邑이 高墟村(沙梁部)과 楊山村(及梁部)의 2部로 구성되어 있었던 점은 4세기 이후 신라의 王都가 6部로 정비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王都가 5부(中·東·西·南·北部)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신라의 王都는 6부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신라 초기의 國邑(2部)에 주변 4方의 4村이 추가 편입되면서, 결국 王都가 6部로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國邑 2部에서 王都 6部로의 발전 시기는, 『三國遺事』 王曆에서 基臨尼師今 10년(307)에 “網羅四方”의 뜻에서 국호를 ‘新羅’로 정했던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基臨尼師今 10년에 국호를 다시 ‘新羅’로 바꾸었다고 하는 한편, 智證王 4년(503)에도 국호를 ‘新羅’로 정했다는 기록이 중복되어 나온다. 이에 대해 전자는 王都 6部의 정비와, 후자는 지방(城·村)의 정비와 관련된 국호의 선포라고 그 의미를 구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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