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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저자정보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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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원의 순제 토곤테무르가 재위하는 기간에 원에서는 수재와 기근이 빈발하고, 한인의 봉기가 집중적으로 일어나면서 혼란 상황에 놓였다. 특히 紅巾賊으로 대표되는 한인들의 반원 활동으로 인해 남북의 물류가 막히면서 원 내부적으로도 경제적 압박이 가중되었다. 반원을 기치로 내건 한인들을 막기 위해 총책임을 맡은 승상 톡토[脫脫]는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恭愍王은 즉위 초로 아직 입지가 탄탄하지 않기 때문에 원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원의 원병 요청을 받은 고려는 40여 명의 장수와 2,000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이 군사들은 장사성 세력과 고우와 육합 그리고 회안성 등에서 전투를 벌였다. 공민왕 3년 8월에 북경에 도착한 고려군은 톡토를 따라 이동해 11월에 고우와 육합성 등에서 장사성 세력과 전투를 벌였으며, 톡토가 원의 내부 정치 상황의 변화로 인해 실각이 된 후에도 고려군은 타이부카의 아래에서 전투를 벌였다. 1355년 초부터는 회안성을 중심으로 장사성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고려는 이권과 최원을 포함한 6명의 장수가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기도 하였는데, 장사성 토벌은 톡토의 실각과 토벌군의 사기 저하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톡토 실각 후 고려군은 1355년 2월부터 5월 사이에 순차적으로 귀국을 했는데, 장사성 토벌은 고려가 혼란한 원의 내부 사정과 군사력 약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얻은 여러 정보는 전쟁에 참여한 장수들을 통해 공민왕에게 전달되었으며, 이 정보는 공민왕이 원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로 작동됐다. 기철 일파를 제거하고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한 것은 1356년 5월에 가서 실행되었지만, 전주에서 벌어진 정지상과 어향사 예쓰부카와의 충돌 사건을 살펴보면, 그 계획은 이미 1355년부터 계획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는 고려군의 장사성 토벌 참여로 인한 정세 파악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즉 1354년 장사성 토벌 참여는 원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체제를 구축하려는 공민왕의 정책 설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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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CI(KEPA) : I410-151-26-02-094319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