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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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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궁예는 어린 시절에 생존을 위해 세달사로 가서 출가하였다. 그렇지만 장성한 뒤에는 왕이 될 야망을 간직한 채 점차 자신의 기질을 발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세달사에서 나온 그는 처음에 기훤을 찾아갔으나, 원하는 예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기훤을 떠난 궁예는 양길의 수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궁예는 양길의 지원을 받아 치악산 석남사에 머물면서 동쪽의 주천・나성(내성)・울오・어진 등을 차례로 공략하여 양길에게 바쳤다. 그 대가로 명주(강릉)에서 나올 때 3,500명의 무리를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만들며 자립하였다. ‘어진’은 필자가 조선 시대의 지리서와 고지도를 분석해본 결과 그 위치를 지금의 평창군 진부면 일대로 비정하였다.
    이후 궁예는 895년까지 저족・성천・부약・금성・철원 등을 차례로 차지하며 패서의 지방 세력까지 받아들였다. 이때 송악의 왕건 가문도 내투하였다. 896~897년에 궁예는 승령・임강・인물현과 공암・검포・혈구성을 차지하였고, 897~898년에 송악을 수도로 정하여 개발하는 동안 양주・견주 등에서 양길과 충돌하였다. 견주는 최근에 출토된 태봉국 목간을 고려할 때 양주 대모산성일 가능성이 크다.
    궁예와 양길의 대립은 899년 비뇌성 전투 및 900년의 후속 전투들로 이어지며 일단락되었다. ‘비뇌성’의 위치를 필자는 근래에 지지를 받아온 안성 죽주산성 대신 충주시 앙성면에 있는 ‘비내섬’으로 비정하였으며, 꼭 이곳이 아니라고 해도 북원(원주)과 국원(충주)을 잇는 남한강 구간에서 찾을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비뇌성 전투는 궁예가 양길을 제압함으로써 경기・강원 남부 및 충북의 지방 세력들까지 통합하고 한반도 중부 전역의 영토를 차지함에 있어 교두보와 같은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비뇌성 전투의 승리는 궁예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운영을 철원 환도로 시작하기 위한 새로운 礎石으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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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CI(KEPA) : I410-151-26-02-095593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