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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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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藏書閣 제5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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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趙秉稷은 楊州趙氏 출신으로, 해당 가문은 전체적으로 소론의 정치 성향을 가졌으나 그의 조상은 노론 4대신 중 하나인 趙泰采의 형 趙泰彙로, 그에 따라 그의 집안 역시 노론적인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81년 일본에 파견하는 朝士視察團에 합류하여 李永과 함께 稅關 시찰 사무를 맡았으며, 해당 경력을 토대로 1883년에 창설된 근대적 관세 징수 기구인 海關을 감독하는 仁川監理로 파견되기에 이르는데, 여기서 그가 근대 외교 인력 양성의 중요한 통로인 조사시찰단-감리 경로의 대표적인 예임을 알 수 있다.
    감리직 수행을 마친 그는 북방 지역인 함경도에 按撫使로 파견되어 청과의 국경 분쟁에 파생되는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작업은 이후 조· 청 공동 勘界로 이어졌다. 이후 중앙에 복귀하여 외교부처인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協辦을 거쳐 督辦 서리를 맡아 외교 업무의 수장직에 올랐는데, 다소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업무 처리가 지체되는 경우가 발생하여 청의 袁世凱를 비롯해 프랑스 공사를 중심으로 한 외국 외교관들에게 비판받기도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기에 일본군이 자국 공관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출병시키자 그는 외교 수장인 통서 독판의 입장에서 단호하고 원칙주의적인 태도로 철병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일본 공사 오오토리(大鳥圭介) 등과 대립하였다. 그러나 청과 조선의 관계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연결되어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청국의 철군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하게 넘어가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잠시 외직으로 나가 있던 그는 이듬해인 1895년에 복귀하고 1896년 俄館播遷 이후에 農商工部大臣이 되었는데, 을미사변 이후 관직 재임의 경력으로 인해 다소 부담감을 느끼고 규탄을 받기도 하였다. 다양한 직책을 오가며 국정 경험을 쌓은 그는 독립협회와 비교적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여 그들로부터 규탄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나 적극적인 참여 또한 하지 않았다. 아울러 法部大臣과 고등재판소 재판장으로 재직하면서 동학 제2대 교주인 崔時亨의 사형판결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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