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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 자료유형
- 학위논문
- 저자정보
- 지도교수
-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 발행연도
- 2013
- 저작권
- 성균관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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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과 무술변법은 각각 한국과 중국의 근대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두 사건은 개혁시대, 국내외적 배경, 개혁사상, 주도 인물 및 역사적 지위 등 방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면에서는 차이점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본 연구는 이 가운데 관학개혁을 중심으로 두 나라의 교육개혁상의 배경, 내용, 원인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19세기말, 조선과 청나라는 모두 대외적으로 열강의 침략에 의해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위협을 받았고, 대내적으로 봉건통치의 위기가 심해지는 한편 자산 계급이 완만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메이지유신을 완성한 일본은 나라의 힘이 강대해지면서 동아시아 패권을 잡기 위해 적극적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것을 기회로 이용하여 군대를 조선에 급파하고, 나아가 조선왕궁을 급습하여 친일정부를 세운 후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쟁취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는 국민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망국의 위협에 직면한 중국인이 애국구망(愛國救亡) 운동을 불러일으킨 결과 1898년에 무술변법을 발생시켰다. 이상의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국 개혁의 시작은 일본과 큰 관련이 있다.
일본은 양국 개혁의 시작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양국의 개혁사상의 배경 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갑오개혁의 중추적인 인물인 박영효(樸泳孝)와 유길준(兪吉濬)은 일본과 미국에 오랫동안 있는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의 교육개혁 구상에도 서구근대 신식문화의 흔적이 많이 나타났다. 무술변법의 주요인물인 강유위도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극도로 추앙하여 일본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국의 교육개혁은 모두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참조했지만, 개혁 내용면에서는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갑오개혁의 관학개혁은 민중의 계몽을 중심으로 삼아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중시하고 학교 성립도 소학교, 중학교, 대학 세 단계로 나눠서 전개했던 데에 비해 무술변법은 인재의 양성을 중점으로 대학교인 경사대학당을 설립하고 경사대학당을 표준으로 삼아 그에 따라서 소학교·중학교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구상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의 교육개혁은 크게 제 1, 2, 3차로 구분되는데, 시기별로 교육개혁의 내용이 점점 성숙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 1차는 인재양성인 전통교육의 틀에 벗어나지 못하였다. 제 2차에서는 충군애국의 목적이 잔존하지만 국민 계몽을 위한 근대적인 교육이 시행했다. 그리고 제 3차에서는 국민 교육이 진일보하며 제도적으로 크게 완비되었다. 무술변법은 갑오개혁과 달리 시간에 따라 오히려 점차 후퇴하는 모습을 나타났다. 강유위는 1895년의 공거상서(公車上書)에서 이미 국민을 계몽하고 신식 학제를 세우라는 요청을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수구파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처음에는 신식 학제를 만들려고 있으나, 결국 북경에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팔고문의 폐지도 과거를 전체적으로 폐지려고 있으나 결국 팔고문만 폐지하게 됐다. 또 양국은 모두 서구 신식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유학 위주의 동양문화가 부분적으로 유지되었지만, 한국은 “충군애국(忠君愛國)”등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부분에서 유학사상을 유지한 반면, 중국은 봉건통치를 유지한 고려가 있기도 했지만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學爲體,西學爲用)”, 곧 본질적으로 중학이 서학보다 앞선다는 관념을 가지고 유학교육을 지속했다.
또한 양국은 모두 일본을 표준으로 삼았지만, 국내외환경과 개혁세력의 차이에 따라 상이한 정책을 채용하였으며, 그 결과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한국은 갑오개혁을 통해 유교적 인재양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근대적인 신식 교육제도를 세웠지만 개혁이 일본에 침략의 계기를 제공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국의 무술번법은 실권이 없는 유신파와 광서황제에 의지하여 교육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봉건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 개혁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외부 침략 세력이나 국내 봉건 통치 계층에 의존하여서는 근대화 개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 신식 문화나 구식 문화를 채용할 때 통치세력이 자신들의 이해와 생각만으로 추진하고 국민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세 번째, 신식 문화로 향해 개혁하는 과정에서 구식 문화를 곧 바로 포기하지 못하면 양자의 투쟁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네 번째, 개혁을 통해 볼 때 19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 각국이 상호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강해졌다는 점이다.
19세기말, 조선과 청나라는 모두 대외적으로 열강의 침략에 의해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위협을 받았고, 대내적으로 봉건통치의 위기가 심해지는 한편 자산 계급이 완만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메이지유신을 완성한 일본은 나라의 힘이 강대해지면서 동아시아 패권을 잡기 위해 적극적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것을 기회로 이용하여 군대를 조선에 급파하고, 나아가 조선왕궁을 급습하여 친일정부를 세운 후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쟁취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는 국민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망국의 위협에 직면한 중국인이 애국구망(愛國救亡) 운동을 불러일으킨 결과 1898년에 무술변법을 발생시켰다. 이상의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국 개혁의 시작은 일본과 큰 관련이 있다.
일본은 양국 개혁의 시작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양국의 개혁사상의 배경 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갑오개혁의 중추적인 인물인 박영효(樸泳孝)와 유길준(兪吉濬)은 일본과 미국에 오랫동안 있는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의 교육개혁 구상에도 서구근대 신식문화의 흔적이 많이 나타났다. 무술변법의 주요인물인 강유위도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극도로 추앙하여 일본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국의 교육개혁은 모두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참조했지만, 개혁 내용면에서는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갑오개혁의 관학개혁은 민중의 계몽을 중심으로 삼아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중시하고 학교 성립도 소학교, 중학교, 대학 세 단계로 나눠서 전개했던 데에 비해 무술변법은 인재의 양성을 중점으로 대학교인 경사대학당을 설립하고 경사대학당을 표준으로 삼아 그에 따라서 소학교·중학교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구상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의 교육개혁은 크게 제 1, 2, 3차로 구분되는데, 시기별로 교육개혁의 내용이 점점 성숙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 1차는 인재양성인 전통교육의 틀에 벗어나지 못하였다. 제 2차에서는 충군애국의 목적이 잔존하지만 국민 계몽을 위한 근대적인 교육이 시행했다. 그리고 제 3차에서는 국민 교육이 진일보하며 제도적으로 크게 완비되었다. 무술변법은 갑오개혁과 달리 시간에 따라 오히려 점차 후퇴하는 모습을 나타났다. 강유위는 1895년의 공거상서(公車上書)에서 이미 국민을 계몽하고 신식 학제를 세우라는 요청을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수구파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처음에는 신식 학제를 만들려고 있으나, 결국 북경에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 팔고문의 폐지도 과거를 전체적으로 폐지려고 있으나 결국 팔고문만 폐지하게 됐다. 또 양국은 모두 서구 신식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유학 위주의 동양문화가 부분적으로 유지되었지만, 한국은 “충군애국(忠君愛國)”등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부분에서 유학사상을 유지한 반면, 중국은 봉건통치를 유지한 고려가 있기도 했지만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學爲體,西學爲用)”, 곧 본질적으로 중학이 서학보다 앞선다는 관념을 가지고 유학교육을 지속했다.
또한 양국은 모두 일본을 표준으로 삼았지만, 국내외환경과 개혁세력의 차이에 따라 상이한 정책을 채용하였으며, 그 결과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한국은 갑오개혁을 통해 유교적 인재양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근대적인 신식 교육제도를 세웠지만 개혁이 일본에 침략의 계기를 제공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국의 무술번법은 실권이 없는 유신파와 광서황제에 의지하여 교육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봉건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 개혁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외부 침략 세력이나 국내 봉건 통치 계층에 의존하여서는 근대화 개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 신식 문화나 구식 문화를 채용할 때 통치세력이 자신들의 이해와 생각만으로 추진하고 국민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세 번째, 신식 문화로 향해 개혁하는 과정에서 구식 문화를 곧 바로 포기하지 못하면 양자의 투쟁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네 번째, 개혁을 통해 볼 때 19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 각국이 상호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강해졌다는 점이다.
목차
- 목차제1장. 서론 1제2장. 개혁과 일본 101.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의 간섭 10가. 내우외환(?優外患) 하의 동학농민전쟁 10나. 일본의 조선을 통제했던 수단 12다. 친일파의 개혁구상 142.중일전쟁 이후의 중국 20가. 중일전쟁과 『하관조약(下關條約)』 20나. 유신파와 광서황제 21다. 일본을 스승으로 삼다 24제3장.갑오개혁의 교육개혁 301. 제 1차 교육개혁 30가. 학무아문 관제 30나. 학무아문고시 322. 제 2차 교육개혁 34가. ?育立? 詔書 34나. 개혁 개요 35다. 사범학교 383. 제 3차 교육개혁 44가. 개혁 개요 44나. 소학교 46다. 성균관의 개혁 50제4장.무술변법의 교육개혁 561. 國是를 明定하는 詔勅[明定國是詔] 562. 팔고문을 페지함 593.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634.보통학교의 설립 67가. 서원을 학교로 바꿈 67나. 신식학당의 설립 695.전문학당과 실업학당의 설립 70제5장.양국 교육개혁의 비교 731. 공통점과 차이점 732. 원인 76제6장. 맺음말 79참고문헌 84ABSTRACT 90표목차표 1. 갑오개혁 교육법령 일람표 36표 2. 한성사범학교 속성과정 졸업자 인수 통계표 41표 3. 한성사범학교 교직원 임명 상황 42표 4. 소학교 졸업자 상황 49표 5. 소학교 교원 임명 상황 50표 6. 성균관 교직원 임면 상황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