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성리학의 수용으로 만들어진 한국 중세사회의 계기적 변화과정이었다.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사상과 문화에서는 유교와 불교, 도교 민간신앙, 그리고 풍수도참 등이 국가에 수렴되어 공존하던 다원적 문화에서 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 문화로 서서히 바뀌게 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변화를 주도하였던 성리학자를 중심으로 성리학적 역사인식과 문명론을 통해 정체성이 성리학화하면서 문화적 지향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단계적으로 밝힘으로써, 성리학이 중세사회의 계기적인 발전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확인하려고 한다.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정통론적 문명론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원 간섭기 이제현과 이곡은 의리와 명분, 인의를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이를 윤리적 원칙으로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내면화하면서 정통론을 수용하고 이를 역사적 사실로부터 확인하고자 하였으며, 성리학적 인간관을 통해 삼강오륜을 실천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원을 정통왕조로 보고 원의 동아시아 지배를 합리화하였는데, 이는 권도를 인정한 원의 춘추공양학을 수용한 결과였다. 이는 고려말 이색에게로 이어졌다. 이색은 고려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논리로써 우왕의 왕위계승을 인정하는 시세적 춘추론을 전개하였다. 이에 비하여 정도전은 정통론을 강화하고 이색의 논리를 비판하였다. 이는 성인의 도를 실천한다는 유학적 문제의식에 따른 것으로, 성리학 윤리에 따라 효를 강조하고 군신관계에서도 의리를 중심으로 하는 의식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었다. 고려의 성리학자들은 단군보다는 기자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계승의식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의 정통론을 기준으로 고려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인식하였다. 이것은 유학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중국 문화를 수용하고자 한 것이며,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일원적 문화를 지향해나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유교와 불교 등이 고려의 국가 체제 안에서 공존하는 다원적 문화인 고려의 전통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한편으로 고려의 전통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원 간섭기 성리학자들은 원의 문화를 고려에 적용시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고려의 제도적 원형을 유지하려고 하였으며, 이를 고려 국가 유지와 동일시하였다. 그에 따라 고려의 제도적 기반과 국가적 정체성을 위협하려는 시도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였다. 고려의 전통문화는 개혁의 대상이지만 반대로 지켜야만 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원 간섭기 성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문명론을 지향하면서도 이를 고려의 전통문화와 절충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고려말에는 성리학이 점차 내면화함에 따라 문명론에서도 분기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이색과 정도전의 문명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색은 불교를 인정면서도 효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적 의례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색의 문명론은 성리학 중심의 문명론이지만, 제한적 의미에서 불교와 풍수지리, 민간신앙과의 공존을 인정하는 점진적 성격을 띤다. 이것은 그의 단군인식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원 간섭기 사료에 전혀 등장하지 않던 단군은 이색에 의하여 다시 사료에 등장하였다. 이색은 단군을 國祖로 보았으나, 문화적 의미는 기자에게 부여하였다. 따라서, 문화적으로는 고려의 전통을 상징하는 단군보다는 교화를 상징하는 기자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정도전은 고려의 전통문화를 부정하였다. 그는 불교의 교리를 성리학의 논리로 비판하였으며, 고려의 전통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오로지 기자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계승의식을 기반으로 성리학 예제인 ??주자가례??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은 이색의 점진적 문명론보다 매우 급진적인 문명론이었다. 이것은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조선건국을 지향하는 정치적 입장과 일치한다. 이와 같은 문명론의 분기는 조선초기 권근에 의해서 결합되었으며, 조선적 문명론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권근은 ‘理’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인식을 전개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權道를 인정하는 유연한 역사인식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이색과 정도전과 같이 기자를 중요시하였으나, 단군신화가 등장한다는 범에서는 단군인식의 강화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권근이 이색의 점진적 문명론과 정도전의 급진적 문명론을 결합하고 조선적인 방법으로 문명교화를 지향한다는 것으로, 성리학 국가 조선이 지향해야할 문명교화는 조선의 전통과 성리학적 문명론이 공존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은 성리학이 내면화하면서 국사를 성리학과 정통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나타난 전통에 대한 비판의식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과거로부터의 전통은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성리학적 문명론과 전통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메우고 공존을 추구하는 과정이며, 새로운 문물 수용의 방법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