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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여진족이 금(金)나라를 세운 뒤 요(遼)나라와 북송(北宋)을 차례 무너뜨렸던 12세기 초엽은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요동쳤던 시기로, 이후 동북아시아는 금을 정점으로 하여 재편되다. 완안부의 대두(擡頭)와 금나라의 건국은 고려의 건국 직후부터 국경을 접하며 오랜 기간 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던 고려와 여진[금]의 관계에도 변화를 야기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금나라는 대몽골 올로스[Yeke Mong?ol Ulus]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고려를 침공하지 않은 일은 금나라의 건국 이전 요나라가 고려를 3차례 침공한 것과 대몽골 올로스가 고려를 7차례 침공하였던 사건과는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국내에서는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신라(新羅)’혹은 ‘고려(高麗)’에서 왔다는 기록과 연관시켜 금과 고려 사이에 ‘동류의식(同類意識)’이 있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금과 고려 사이에 동류의식이 있었다는 이러한 인식은 민족사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금과 고려의 관계에 있어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는 민족사학적 시각의 연구는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객관적인 시각이 일부 결여됨에 따라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우선 금과 고려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 당시 금의 내부적인 상황이나 입장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지만 당시 고려를 이해하는 부수적인 입장에서만 다루어졌다. 더불어 고려의 대(對)금 외교에 있어 긍정적인 면만을 언급하며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거나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본고에서는 고려를 중심으로 하여 고찰하였던 기존 국내의 연구시각에서 벗어나 12세기 초엽에 발생한 대내외적인 상황에서 금나라가 지향한 대외 정책을 통해 금과 고려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본 연구에서는 『고려사』를 기본 자료로 활용하고 중국의 사료(史料)들을 보조적인 사료로 이용했던 기존의 연구들과는 반대로 중국의 정사(正史)인 『금사』를 비롯하여 『거란국지』, 『삼조북맹회편』등의 사료를 기본 자료로서 활용하여 금과 고려의 관계에 대한 검토 및 재해석을 하였다. 이를 통해 12세기 초엽 금과 고려의 관계를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12세기 초엽 금은 요의 핍박과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재정의 결핍과 병력 부족 등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이시기 금은 동북아시아 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며 최소한 불화는 피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양상은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금나라 황실 시조는 신라인이었으나 『금사』와 『고려사』에 시조를 고려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발해유민과의 융화를 이루기 위함이나 고려와의 외교 교섭을 위한 정치적인 수식이었을 뿐이었다. 또한 금은 갈라전 전투를 통해 고려에 대한 불신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금과 고려 사이에 ‘동류의식(同類意識)’이 있었다는 인식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셋째, 12세기 초엽 금과 고려의 최대 외교현안이었던 보주(保州)문제에 있어 금이 고려에게 보주를 양보한 일은 당시의 동북아시아 정세가 급변함과 더불어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이후 북송을 무너뜨릴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북송을 무너뜨린 이후 금은 이전과 달리 고려에게 서표(誓表)나 보주에 귀속한 호구(戶口)를 돌려받는 문제에 있어 고려에 강한 압박을 하였다. 이후 1142년 고려 인종(仁宗)에게 책봉(冊封)을 해주며 양국은 정식적으로 사대(事大)외교를 했으며 계속된 금의 재정 문제로 인해 금은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12세기 초엽 금과 고려의 관계에 있어 고려가 실리적인 외교를 한 측면도 없지 않으나 당시 금의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금이 고려에 대한 압박을 하지 못한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금과 고려의 관계에 있어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는 민족사학적 시각의 연구는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객관적인 시각이 일부 결여됨에 따라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우선 금과 고려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있어 당시 금의 내부적인 상황이나 입장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지만 당시 고려를 이해하는 부수적인 입장에서만 다루어졌다. 더불어 고려의 대(對)금 외교에 있어 긍정적인 면만을 언급하며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거나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본고에서는 고려를 중심으로 하여 고찰하였던 기존 국내의 연구시각에서 벗어나 12세기 초엽에 발생한 대내외적인 상황에서 금나라가 지향한 대외 정책을 통해 금과 고려의 관계를 고찰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본 연구에서는 『고려사』를 기본 자료로 활용하고 중국의 사료(史料)들을 보조적인 사료로 이용했던 기존의 연구들과는 반대로 중국의 정사(正史)인 『금사』를 비롯하여 『거란국지』, 『삼조북맹회편』등의 사료를 기본 자료로서 활용하여 금과 고려의 관계에 대한 검토 및 재해석을 하였다. 이를 통해 12세기 초엽 금과 고려의 관계를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12세기 초엽 금은 요의 핍박과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재정의 결핍과 병력 부족 등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이시기 금은 동북아시아 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였으며 최소한 불화는 피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양상은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금나라 황실 시조는 신라인이었으나 『금사』와 『고려사』에 시조를 고려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발해유민과의 융화를 이루기 위함이나 고려와의 외교 교섭을 위한 정치적인 수식이었을 뿐이었다. 또한 금은 갈라전 전투를 통해 고려에 대한 불신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금과 고려 사이에 ‘동류의식(同類意識)’이 있었다는 인식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셋째, 12세기 초엽 금과 고려의 최대 외교현안이었던 보주(保州)문제에 있어 금이 고려에게 보주를 양보한 일은 당시의 동북아시아 정세가 급변함과 더불어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이후 북송을 무너뜨릴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북송을 무너뜨린 이후 금은 이전과 달리 고려에게 서표(誓表)나 보주에 귀속한 호구(戶口)를 돌려받는 문제에 있어 고려에 강한 압박을 하였다. 이후 1142년 고려 인종(仁宗)에게 책봉(冊封)을 해주며 양국은 정식적으로 사대(事大)외교를 했으며 계속된 금의 재정 문제로 인해 금은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12세기 초엽 금과 고려의 관계에 있어 고려가 실리적인 외교를 한 측면도 없지 않으나 당시 금의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금이 고려에 대한 압박을 하지 못한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목차
- Ⅰ. 서론 1Ⅱ. 여진[金]과 요의 전쟁과 대(對)송 외교 111. 여진[金]과 요(遼)의 전쟁 원인 검토 142. 금 건국 초기 대(對)송 외교 분석 24Ⅲ. 금(金) 건국 이전 여진과 고려의 상호 인식과 관계 361. 금나라 황실 시조(始祖)의 출자지(出自地) 재검토 362. 금 건국 이전 여진과 고려 관계 50Ⅳ. 요(遼)·금(金) 교체기의 대(對)고려 관계 601. 금 건국 초의 재정난과 보주(保州) 문제 612. 금 중심의 동북아시아 질서 재편과 대(對)고려 관계의 변모 74Ⅴ. 결론 87참고문헌 90부 록 99영문요약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