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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유기홍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대학원)

지도교수
양무진
발행연도
2017
저작권
북한대학원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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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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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되었지만, 그것이 독립운동의 끝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부정된 채 남과 북으로 나뉘어 미국과 소련의 군정 하에 놓인 한반도는 아직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백범 김구는 “독립주권” 창조라는 “무엇보다도 긴급하고 중대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통일전선을 모색했다. 그는 남과 북의 동포, 좌파와 우파, 남녀노소 등 “극소수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한국 동포”가 마치 한 사람같이 굳게 단결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해방 3년 후인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은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이른바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전선운동의 정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대부분 이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노선이었으며 남과 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들어서면서 결국 ‘실패’했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남북협상을 통한 남북 단독정부 수립 저지라는 목표가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남북협상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었고, 오히려 북한에 이용당하는 결과만 가져왔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남북협상과 통일전선운동의 의의는 그 실패 혹은 성공이 아니라 이 운동이 어떻게 계승, 발전되었는지에서 찾아야 한다.
복잡한 정치정세 변화 속에서 여러 차례 부침을 겪기도 하고, 실패를 거듭하기도 했으나 해방 전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 시절에서부터 해방 반탁운동과 남북협상 추진에 이르기까지 김구의 사상과 철학은 일관되게 완전한 자주독립통일국가의 실현에 맞춰져 있었다. 해방 72년, 점점 더 고착화되어 가는 분단체제 하에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에 대한 의의를 지워버리고 해방 후 우익 중심의 정부 수립 노력과 ‘대한민국’ 단독정부로서의 ‘건국’만을 기리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는 오늘에 있어서 김구의 남북협상과 민족자주 통일론을 짚어볼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48년 남북협상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향후 통일과정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도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목차

국문요약 = Ⅴ
제1장 서론 = 1
제1절 문제의 제기 = 1
제2절 연구의 방법과 범위 = 11
제2장 김구의 민족자주 통일론의 형성과 변화 = 18
제1절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구상 = 18
제2절 미완의 해방과 남북통일의 과제 = 23
제3장 분단현실과 외세의 지배 = 29
제1절 초라한 환국 = 29
제2절 모스크바 3상회의와 반탁운동·우익의 재편 = 33
제3절 1946년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 = 38
제4절 2차 유엔 소총회 결의와 단독선거의 강행 = 50
제5절 남북협상의 모색 = 64
제4장 남북협상의 좌절과 분단국가의 수립 = 74
제1절 민족세력의 결집과 평양행 = 74
제2절 평양의 김구 = 101
제3절 남북협상의 좌절과 분단정권의 수립 = 120
제4절 김구 암살과 남북협상파에 대한 탄압 = 142
제5장 끊임없는 소환-통일운동과 김구 = 148
제1절 제헌의회 이후 소장파의원들과 조봉암 = 148
제2절 4.19와 남북협상론의 부활 = 173
제3절 군사정권 하의 통일논의 = 181
제4절 남북협상과 김구에 대한 재평가 = 195
제6장 결론 = 207
참고문헌 = 216
ABSTRACT =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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