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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저자정보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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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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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이 연구는 1900년부터 광복 이전까지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조선총독부의 조선고적조사사업 과정에서 나타난 일본학자들의 식민지 지배사상 과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조사활동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남긴 조사보고서와 유리건판을 대조하였다. 이를 통해 집안지역과 평양지역의 벽화내용을 알아보고 벽화고분에 대한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활용, 그리고 당시 일본학자들의 조사방식과 조사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알아보았다.
    이를 위해 [부록2]일제강점기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내용에서 집안지역 벽화고분은 통구를 중점으로 번역하고 평양지역 벽화고분은 조선고적도보를 포함한 세키노의 여러 조사보고서들을 번역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선고적조사사업은 1916년 조선총독부의 ‘5개년 계획’부터 식민지 사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일본학자들은 유물과 유적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보존의 필요도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고구려 벽화고분 또한 일본학자들의 식민지 지배라는 인식하에 이루어진 하나의 조사대상일 뿐이었다.
    일본학자들의 벽화고분에 대한 조사는 대부분 유리건판으로 남아있으며 조선고적도보와 같은 일제강점기 조사보고서에 그대로 활용되었다. 이는 [부록1]에서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조선고적도보와 유리건판을 비교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사보고서와 유리건판과의 대조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해 중국 미술의 영향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서술하였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았기에 우수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 보았을 때 무용총, 각저총, 매산리 사신총의 경우는 특히 필치와 필력의 수준이 매우 낮은 것으로 보았다.
    둘째, 일제강점기 조사보고서에는 벽화고분의 구조와 내용에 대한 오류가 보인다. 특히 삼실총의 경우, 통구에서는 인물이나 가옥의 수 등을 잘못 분석했다. 이는 일본학자가 실물벽화를 보지 않고 사진자료를 통해서 벽화내용을 분석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셋째, 조사보고서는 벽화제재 중에 필요한 내용만을 설명하거나 도판으로 대신하였다. 통구에서는 무용총과 각저총의 천장부의 제재가 너무 많아 그 설명을 생략하였다. 그러나 무용총과 각저총은 같은 천상세계를 표현했으나 그 의미가 달라 중요하다. 각저총은 천장에 가득한 당초문이 표현된 반면에 무용총은 당초문 이외에도 화염문, 사신, 선인 등의 요소들이 등장하며 특히 측면연꽃이 곳곳에 배치되어 불교적 세계관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넷째, 일제강점기 보고서에는 벽화제재의 모사도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 있어 현재 실물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혹은 실물을 볼 수 있는 유리건판 등의 시각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모사도를 통해서만 벽화제재를 볼 수 있다. 이는 현재 벽화의 실물을 파악할 수 없어 한계를 지닌다. 무용총의 완함 연주자 모사도의 존재는 조사보고서의 기록으로만 확인이 가능하다. 그 모습이 박락되어 현재 연주자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통구 사신총의 무인의 모습은 모사도를 통해서만 확인가능하여 실물 벽화의 상태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섯째, 일제강점기 보고서에는 각각의 벽화고분들에 대한 구체적인 편년추정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벽화고분 이외에도 많은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였기에 편년시론까지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학자들은 구체적인 근거없이 고구려 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거나 다른 특정 벽화고분과의 비교를 통해 비슷한 연대로 보았다. 특히 건축학자인 세키노가 조사한 평양지역의 벽화고분들은 대부분 약 1500년 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일제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쌍영총의 우차행렬 인물들, 내리1호분의 북벽, 간성리 연화총의 회오리 문양 등은 현재 연구에서 활용되지 않은 부분들로 고구려 벽화연구에서 특히 편년을 알아볼 때에 하나의 제재로서 가치를 지닌다. 또한 편년시론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절천정총과 계명리 고분, 그리고 운봉리 고분의 구조와 벽화내용에 대한 자료의 경우, 다른고분과의 비교를 통해 또 다른 편년해석의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벽화고분의 훼손이나 접근성의 문제로 실물을 보기 힘든 벽화고분의 자료를 집대성하고 현재 자료를 보완할 수 있는 원천자료의 발견의 일환으로서 일제강점기 조사된 고구려 벽화고분을 살펴보는 것은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목차

    1. Ⅰ. 서론 = 1
      Ⅱ. 일제 강점기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현황 = 8
      1. 조선고적조사 사업과정(1900~1945) = 8
      1)조선총독부고적조사위원회의 조사(1909~1920) = 9
      2)조선총독부고적조사과의 조사(1921~1930) = 15
      3)조선고적연구회의 조사(1931~1945) = 16
      2.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활동(1909~1945) = 18
      1)1910년대 = 18
      2)1920년대 = 25
      3)1930년대 = 26
      4)1940년대 = 29
      3. 조선고적조사가 남긴 벽화고분자료들 = 33
      Ⅲ. 일제강점기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검토 = 56
      1. 일제강점기 조사 자료의 문헌기록과 유리건판 내용의 대조 = 56
      2. 일제강점기 벽화고분 조사 자료의 한계와 문제점 = 62
      Ⅳ. 결론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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