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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이 논문의 목적은 이승만이 워싱턴회의 시기(1921-1922)와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시기(1931-1933)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전개한 독립외교활동을 그가 수집 및 제작한 신문 스크랩을 통해 분석하는 것이다. 군비축소와 평화적 군제분쟁해결을 목표로 국제법과 조약준수가 중시되던 전간기의 특성은 약소국의 외교적 독립활동에 희망을 제공했다. 외교독립노선을 견지했던 이승만은 전쟁 또는 국제적 분쟁 직후 질서재편의 목적으로 개최된 국제회의를 전후하여 독립외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워싱턴회의와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서 이승만은 열강의 대표단과 정치지도자를 향한 청원외교와 국제사회의 여론과 대중을 향한 공공외교를 전개했다. 두 회의를 전후하여 이승만은 공공외교활동의 일환으로 신문 스크랩활동을 수행했는데 이를 통해 국제정세를 조망하고 자신 또는 한국대표단의 공공외교적 성과를 파악했으며 코리아독립을 위한 청원외교에 활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킨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자 단장으로서 한국대표단의 독립외교활동을 지휘했다. 한국대표단은 공식적인 지위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5대 승전국들 중 하나였던 일본대표단에 맞서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비록 코리아문제가 워싱턴회의의 정식 의제로 채택되지는 못했지만, 공공외교적 측면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 내 개신교 네트워크를 통해 공공외교의 기반을 확충했고,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는 이승만 독립외교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이승만의 신문 스크랩은 한국민들의 독립의지와 독립능력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이승만의 외교활동들이 미국 언론에 상세히 보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만주사변 발생 이후 대두된 만주문제를 다루고자 소집되어 일본의 국제연맹탈퇴를 이끌었던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시기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명전권대사로 제네바에 파견되어 독립외교활동을 재개했다. 하와이를 떠난 이승만은 미국 본토를 거치며 그곳에서 미국 정부와 여론을 상대로 청원외교 및 공공외교활동을 전개했으며 신문 스크랩 활동을 재개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했다. 워싱턴회의 시기 활용된 개신교 네트워크의 공공외교적 지원과 국제법적 논리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시기에도 계승되었다. 제네바에 도착한 이승만은 외교활동의 전반기에는 한국문제를 직접 회의에 상정시키려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외교활동의 방식을 바꾸어 만주의 한인들의 문제를 부각시키며 한국의 독립문제를 간접적으로 호소했다. 이 시기 이승만의 외교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와 같은 공식적인 외교기관이나 비공식적인 수행원이 없었던 ‘단신 외교’였기에 활동의 범위가 제한되고 체계성이 결여되었다는 한계가 존재했지만 언론계와 개신교계 및 학계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중화민국대표단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궁극적으로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에 기여했다는 면에서 그의 외교활동은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국제연맹회의에 한국문제가 상정되지는 못했지만 한국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대륙 침략을 자행하던 일본의 선전에 맞서 국제법적 수사를 활용하여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했다는 측면에서 그의 공공외교적 성과는 작지 않았다.
워싱턴회의와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서 이승만은 열강의 대표단과 정치지도자를 향한 청원외교와 국제사회의 여론과 대중을 향한 공공외교를 전개했다. 두 회의를 전후하여 이승만은 공공외교활동의 일환으로 신문 스크랩활동을 수행했는데 이를 통해 국제정세를 조망하고 자신 또는 한국대표단의 공공외교적 성과를 파악했으며 코리아독립을 위한 청원외교에 활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킨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자 단장으로서 한국대표단의 독립외교활동을 지휘했다. 한국대표단은 공식적인 지위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5대 승전국들 중 하나였던 일본대표단에 맞서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비록 코리아문제가 워싱턴회의의 정식 의제로 채택되지는 못했지만, 공공외교적 측면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 내 개신교 네트워크를 통해 공공외교의 기반을 확충했고,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는 이승만 독립외교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이승만의 신문 스크랩은 한국민들의 독립의지와 독립능력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이승만의 외교활동들이 미국 언론에 상세히 보도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만주사변 발생 이후 대두된 만주문제를 다루고자 소집되어 일본의 국제연맹탈퇴를 이끌었던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시기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명전권대사로 제네바에 파견되어 독립외교활동을 재개했다. 하와이를 떠난 이승만은 미국 본토를 거치며 그곳에서 미국 정부와 여론을 상대로 청원외교 및 공공외교활동을 전개했으며 신문 스크랩 활동을 재개하여 국제정세를 파악했다. 워싱턴회의 시기 활용된 개신교 네트워크의 공공외교적 지원과 국제법적 논리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 시기에도 계승되었다. 제네바에 도착한 이승만은 외교활동의 전반기에는 한국문제를 직접 회의에 상정시키려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외교활동의 방식을 바꾸어 만주의 한인들의 문제를 부각시키며 한국의 독립문제를 간접적으로 호소했다. 이 시기 이승만의 외교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와 같은 공식적인 외교기관이나 비공식적인 수행원이 없었던 ‘단신 외교’였기에 활동의 범위가 제한되고 체계성이 결여되었다는 한계가 존재했지만 언론계와 개신교계 및 학계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중화민국대표단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궁극적으로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에 기여했다는 면에서 그의 외교활동은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국제연맹회의에 한국문제가 상정되지는 못했지만 한국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대륙 침략을 자행하던 일본의 선전에 맞서 국제법적 수사를 활용하여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국제사회의 여론을 환기했다는 측면에서 그의 공공외교적 성과는 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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